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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한국의 성장은 어떤 '갈림길'에 이르렀다.

글/김신동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이사장

[좋은나라 이슈페이퍼]세계화 전략과 한국의 질적 도약

  며칠 전 파리정치대학 동문들의 신년 모임에 참석했다. 나는 이 명문대학의 졸업생이 될 행운은 없었지만 십 년 전에 석좌교수로 일 년을 가르치고 온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동문 모임에 초대 받곤 한다. 오만가지 추억담이 쏟아지는 가운데 어느 분이 프랑스인들의 개방적인 태도에 대한 본인의 인상을 이야기 했다.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릴 당시엔가 한국 팀이 승리를 해서 한인 교민과 유학생 등이 샹젤리제까지 시가행진을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들고 한국식 응원 구호를 외치며 경찰의 제지도 아랑곳없이 나가는데 길가의 프랑스인들이 박수를 쳐주더라는 것이다. 이분의 이야기인즉슨 만약 같은 일이 서울 시청 앞에서 필리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면 한국인들은 아마도 그런 반응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좌중이 대체로 동조하는 눈치였다.
  외국인이나 이방인에 대한 관용에 있어 한국 사회가 프랑스나 서구 선진국에 못 미친다는 점은 새삼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2018년 KOF 세계화 지수에서 한국은 37위를 기록했다. 베텔스만이 2016년에 발표한 조사에서도 37위다. 한국의 국가총생산(GDP) 순위가 12~13위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덩치는 큰 데 스마트하지 못한 꼴이라고나 해야겠다. 한국은 빠른 경제적 부흥과 사회발전, 그리고 정치적 민주화까지를 완성함으로써 세계의 모범 국가로 불릴만한 지위에 이르렀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발전과 성장은 눈에 띄게 더뎌지고 이제는 거의 천정에 이르지 않았나 불안한 의심을 떨치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 이상 성장동력이 없다든가 중국의 추격으로 인해 경쟁력을 잃었다든가 세계 경제가 전반적으로 나쁘다든가 하는 점들이 요인으로 지목되곤 하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한국의 성장과 발전은 어떤 기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양적 성장이 임계치에 달해서 이제는 질적 전환이 없이는 더 이상 앞으로 발을 디딜 수 없는 시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질적 전환이 필요한 것일까? 국가나 사회의 발전을 개인의 성장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비유는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린아이들은 몸이 무럭무럭 자라지만 대체로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사고한다. 청소년기, 청년기를 지나면서 사회화 과정을 거쳐 남과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고 경험이 무르익는 나이가 되면 비로소 세상을 보는 경륜이 쌓이게 마련이다. 공자는 자신을 알자면 사십이 되어야 하고 세상을 깨닫자면 오십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젊은 발전 국가로 이제 장년에 이른 셈이다.
  이제는 자신만 열심히 뛴다고 성적이 좋아지는 때가 아니고 세상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깊어져야 비로소 세계적인 선도 국가로 나설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과정이 진정한 '세계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사회의 변동과 성숙을 관찰한 점을 연상할 만하다.  
세계화 개념은 지난 이십 여 년 사이에 한국과 전 세계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세계화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세계화의 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승차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눈부신 통신 교통 기술의 발전과 이에 기반한 전지구적 경제 통합 및 문화 혼합이 세계화를 일상의 과정으로 구조화시킨 지 오래다. 세계화가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익하다. 이것은 마치 산업화나 근대화가 좋으냐 나쁘냐를 묻는 것과 같다.  
  세계화란 산업화와 근대화의 연장이며 이것이 다만 전 지구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으로 구조화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산업화나 근대화가 초래한 공과 실이 동시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과 같은 대규모 무역국가들에게 시장과 산업의 세계화는 절대적인 플러스 요인이다. 한국의 수출의존형 경제성장 이력은 이미 한국을 교역 부문에 있어서는 세계화가 많이 진행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런데 한국은 왜 세계화 지수가 아직도 현저하게 낮은가? 나는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우리 사회가 글로벌 역량을 축적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차원이란 글로벌 소통 능력, 글로벌 문화 이해력, 그리고 글로벌 업무 처리 능력이다.  
  글로벌 소통 능력 (global communication competency) 이란 말 그대로 언어 역량이다. 지금은 집중적인 영어교육 덕분에 영어를 제법 잘하는 젊은 학생들을 볼 수도 있지만, 한국인의 영어 능력, 혹은 외국어 능력은 대체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엄청난 교육 자원을 영어 교육에 쏟아 붓는 점을 고려해 보면 한국의 영어 교육 시스템은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언어든 대체로 일이년을 집중해서 공부하면 웬만한 생활 소통이 가능하게 마련이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다가 대학에 와서 일이년 공부하고 현지에 한 학기 정도 교환학생으로 다녀와서 제법 소통을 잘하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본다. 그런데 영어는 십 수 년을 죽어라 공부하고도 벙어리를 면치 못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학생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본적으로는 영어를 한국어로 가르치는 것에 중병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심하게 말하자면 영어를 편하게 말하지 못하는 선생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격이다. 이런 형편에서 영어 교육이 나아지기를 기다린다면 연목구어가 따로 없다.  
소통 능력은 비단 언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의 교육은 유형별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회의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회의란 문제가 되는 의제를 중심으로 효과적인 의견 교환과 수렴을 거쳐 합의나 결론, 그리고 대책에 도달하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이다. 형식적으로는 초등학교 교실에도 회의가 있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회의문화는 절망적이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부터 교실회의까지 회의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사람들이 못나서가 아니다. 회의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그 사람이 문제를 떠안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가만히 있는 게 장땡이다. 학생들은 혼자 튄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손도 들지 않는다. 혹은 자신의 생각을 신속하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남들에게 제시하는 능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방식의 사고와 표현을 습관화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훈련을 시켜줄 교사나 사수가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로벌 문화 이해력 (global cultural literacy) 이란 가치의 보편성과 다양성에 관한 수용력이다. 흔히들 글로벌 문화 이해력을 단순히 다문화에 대한 포용적 태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매우 좁은 인식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념이다. 예컨대 자유나 평등, 인권 같은 개념에 대해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어떤 수준의 내면화된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헝가리의 혁명가이자 시인인 산도르 페토피 (S?ndor Pet?fi, 1823-1849)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시에서 근대 정신의 보편적 가치를 이렇게 분명하게 말한다. "생명은 고귀하나/ 사랑은 더욱 값지다/ 하지만 자유를 위해서라면/ 둘 다 모두 버려야하리." 보편적 가치를 획득한 근대의 정신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가치의 정점에 自由를 놓는 것. 조국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젊은 혁명가 페토피에게 26세의 인생은 짧은 것이 아니었다. 생명도 사랑도 버릴 수 있는 가치인 자유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일단 자유나 평등, 인권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가 내면화되면 타자의 권리에 대한 존중은 당연한 일이 된다. 칸트의 근대적 계몽사상은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 법칙임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가치를 따를 수 있으며 그의 표출인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가지 가치에 대해서는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앞서 인용한 칸트의 도덕률이다.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한'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에 동의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도 쉬운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우리'와 다른 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높지 않다. 근본적인 이유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가 내면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 업무 처리능력 (global business capacity)이란 초보적인 수준에서는 초국가적 비즈니스 관행에 대한 적응 능력이며, 높은 수준에서는 초국적 비즈니스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최근 이십년 사이 한국의 대학들은 많은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하고 있다. 외국에 학생들이 나가보긴 했으나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던 터라 대학들의 외국인 학생 수용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외국인 학생들이 늘어도 학교 행정이나 생활환경은 과거의 방식에서 변하지 않다보니 문제가 속출한다. 출석부에 올라오는 외국인 학생 이름이 한글일 때도 있고 영어일 때도 있다. 한글로 된 이름이 원어 발음을 따를 때도 있고 한국식 한자 읽기 발음일 때도 있다. 이름이 많고 긴 남미의 학생이 오면 이름 쓸 칸이 부족해서 직원이 임의로 한두 개 골라 적고 그걸로 그 학생의 이름이 결정되기도 한다.   북미나 유럽의 이력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고 무슨 능력을 갖추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자기표현이 잘 되어 있다. 한국의 표준 이력서는 사람마다 가진 능력을 감추는 기능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요즘은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이력서 마다 자유 양식이 늘고 있고 자기소개서 등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조직화 하는 방식이 개선되는 추세다. 그러나 영어 방식에 따라 이력서를 써낼 수 있는 능력, 영어로 이메일을 제대로 보낼 수 있는 능력, 영문으로 된 공문서나 편지 등을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 등에서 한국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소수의 조직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관공서, 학교, 회사 등이 글로벌 업무 능력이 결여된 인력 운용을 하고 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비교하면 금새 차이를 확인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일차적으로 질 좋은 상품을 저렴하고 신속하게 만들어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능력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국제 분업 체계에서 저개발 국가가 노릴 수 있는 기회를 잘 포착하고 성공시켰다. 이제 그 입지는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들로 넘어갔고,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은 기술 개발에 의존하여 이차적인 경제 성장을 지속해 왔다. 이제 그 용량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3차적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려면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세계와 소통하는 능력을 갖춘 국가로의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소아적 민족주의나 냉전적 이념 대립은 무겁고 무서운 과거의 족쇄이다. 보편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글로벌 소통 능력으로 무장한 세계 시민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것이 좋은 나라로 가는 유일한 출구이다.  


프레시안 입력 : 2019.01.08 14: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