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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재벌개혁, 지금이 기회

글/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유종일의 경제새판짜기]재벌 개혁, 지금이 기회

경향신문[유종일의 경제 새판짜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은 물론 취임 초까지도 “최초로 재벌개혁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임기 중반 노 전 대통령은 재벌 회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며 투항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규제완화의 순풍을 타고 재벌은 덩치를 불렸고, 총수의 안하무인 황제경영은 더욱 강고해졌다. 그만큼 재벌개혁은 어려운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연 재벌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재벌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스스로를 촛불정부라 칭한다면 정치권력의 민주화와 함께 경제권력의 민주화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재작년 겨울 진주의 촛불집회에서 한 19세 청년은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면 제가 직면한 가정과 학교와 노동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 사람답게 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경제권력의 민주화, 재벌개혁 없이 사람답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사실 나는 과거에 문 대통령의 재벌개혁 의지를 미심쩍어 했다. 참여정부의 재벌개혁 실패에 대한 성찰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심스럽게 기대를 품어 본다. 비록 북핵 문제라는 초대형 이슈에 가려 경제개혁 이슈가 뒷전으로 밀린 감은 있지만 문 대통령이 아직까지 경제민주주의라는 목표를 굳건히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 언술뿐 아니라 개혁적 인사의 중용에서도 드러난다. 경제부처 인사에 아쉬움도 많았으나, 공정거래위원장에 김상조 교수를 임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김 위원장이 아직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재벌개혁의 획기적인 진전을 위하여 치밀하게 단계를 밟고 있을 것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장에 윤석헌 교수를 임명한 것은 감동적이다. 김기식 전 원장의 낙마 후에 안전하게 관료 출신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윤 원장을 임명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재벌개혁이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벌권력은 실로 엄청나고, 그 영향력은 정권의 힘에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경제민주화가 중요하다. 자유를 위한 시민의 투쟁 없이 진정한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듯이 경제권력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민초들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제민주화도 성공하기 어렵다. 이런 면에서 지금이 재벌개혁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다. 정권은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는 반면, 작금의 대한항공 총수 일가 ‘갑질’ 사태와 삼성증권 유령주식 매도 사태로 재벌의 엽기적인 행태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주말부터 시작된 대한항공 직원들의 광화문 촛불집회는 ‘아래로부터의’ 경제민주화를 알리는 시발점이다. 이들의 외침이 또 하나의 미투 운동으로 퍼져 나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갑질’을 청산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이제 정부는 이렇게 유리한 여건을 발판으로 본격적인 재벌개혁에 나서야 한다. 무슨 묘안을 짜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불거진 대한항공과 삼성그룹의 각종 현안을 올바로 처리하기만 해도 된다. 이미 존재하는 법을 최대한 엄정하게 집행하기만 해도 굉장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우선 대한항공과 관련해서는 총수 일가의 폭행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직적인 밀수 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리다. 이미 알려진 사실만 해도 조양호 회장을 비롯한 총수 일가의 관세법 위반은 매우 엄중하며, 정부는 철저한 조사와 함께 그 결과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면 된다. 관세청 내부의 조력자들과 대한항공의 주요 부역자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위에서 시켜서 한 일”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권력자들의 부당한 지배도 끝낼 수 있다.

 

진에어의 항공법 위반사태에 대한 처리는 더욱 중요하다. 면허취소를 포함하여 법리가 허용하는 최대한 처벌을 해야 한다. 정부는 이제껏 말로는 재벌개혁과 중소기업 육성을 외치면서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저가항공 시장에 진에어와 같은 재벌기업 자회사에 면허를 주면서 자격요건을 충분히 갖춘 중소기업의 진입을 막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다. 공정한 경쟁과 혁신을 위해서도 이런 정책은 180도 바뀌어야 한다. 이외에도 조 회장의 상속세 포탈에 대한 철저한 수사, 대한항공에 대한 국적기 특혜의 철회 등 전방위적 압박을 통해 총수 일가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 입력 : 2018.05.10 21:13:00 수정 : 2018.05.10 21: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