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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개츠비곡선과 장벽사회

글/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원장

[유종일의 경제새판짜기]개츠비곡선과 장벽사회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뭐 하는지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저런 사람들….” 이창동 감독의 화제작 <버닝>의 주인공 종수의 말이다. 가난에 허덕이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종수에게 부자 청년 벤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처럼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가난한 종수와 부유한 벤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격차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종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벤처럼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개츠비들은 대부분 애초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이기 때문이다.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 붕괴와 빈부격차 심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그 결과 불평등이 지나치게 큰 ‘격차사회’가 도래하였다. 근래에는 격차사회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장벽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상승이 어려운 사회가 바로 장벽사회다. 장벽에 가로막힌 이 시대의 청년들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이러한 좌절은 청년에게 국한된 게 아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개개인이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계층상승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국민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 작년에는 무려 83.4%에 이르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 하위 10% 가구에 속한 자녀가 중산층에 도달하기까지 5세대가 걸린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무려 150년이 걸리는 셈이다. 

 

격차사회와 장벽사회의 관계는 슘페터호텔과 개츠비곡선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창조적 파괴’라는 문구로 유명한 조지프 슘페터는 불평등에 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했다. 층수가 높을수록 방이 크고 좋은 고층 호텔이 있다고 하자. 꼭대기 층에는 소수 사람만이 호사스러운 방을 차지하고, 맨 밑바닥 층에는 수많은 이들이 작은 방에 꾸겨서 들어앉아 있다. 이것은 한 시점에서 불평등한 분배를 보여준다. 그런데 매일 한 번씩 손님들이 방을 바꾸도록 하면 어떻게 될까? 오늘의 부자가 내일의 가난뱅이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가난뱅이가 내일의 부자가 되기도 할 거다. 슘페터는 이러한 계층 이동성이 충분히 존재한다면, 한 시점에서 불평등이 심한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장벽만 없으면 격차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슘페터의 논리는 옳다. 이때 격차는 노력을 유발하는 인센티브로서 순기능을 한다.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노력들이 모여 경제발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논리에 결정적 허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격차가 커질수록 장벽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오바마의 경제자문회의 의장이던 앨런 크루거는 소득불평등과 세대 간 계층 이동성의 국제비교를 통해 이 사실을 발견하고, 이 관계를 ‘위대한 개츠비 곡선’이라 명명하였다. 오랫동안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경제의 모습이 슘페터호텔과 유사하다 믿었다. 소득불평등이 심한 건 사실이나, ‘기회의 땅’ 미국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신화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면 위층과 아래층의 간격이 커질수록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의 불평등이 클수록 교육과 연줄, 그리고 상속을 통해 자식세대의 불평등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격차가 장벽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진행되어왔다. 무엇보다 과거에 계층 사다리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던 교육이 이제는 오히려 계층을 고착화하고 대물림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부실한 공교육과 불공정한 입시제도로 인하여 부모의 경제력이 상위권 대학 진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비싼 학비로 인하여 대학 진학 후에도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은 학업과 학점 취득에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다. 교육과정을 마치고 취업을 하는 과정에서 출신대학에 따른 차별은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이며, 집안 배경은 스펙과 연줄을 매개로 좋은 일자리를 얻는 데 다시 한번 추가적인 영향을 미친다.

 

상속증여가 또한 장벽을 높이고 있다. 국세통계자료를 보면 상속재산과 추정상속재산, 그리고 증여재산을 포함한 총상속증여재산가액은 2012년 약 21조원에서 2016년 약 32조원으로 늘었다. 김낙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전체 민간자본에서 상속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수성가한 부자보다 상속부자가 더 많은 부와 특권을 누리는 사회를 ‘세습자본주의’라고 규정했는데, 우리나라의 최고 부자들 중 자신의 손으로 부를 일군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국제비교에서 상속부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다. 일반인에게도 상속자본의 중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주택소유계층과 무주택계층의 차이다. 무주택자는 늘어나는 주거비 부담 때문에 소비여력이 제한되는 반면, 주택소유자는 가격상승에 따른 막대한 자본이득을 향유해왔다.

 

장벽이 너무 높으면 격차는 노력을 유발하기보다 자포자기를 낳는다. ‘3포 세대’ 혹은 ‘n포 세대’라고 표현되는 청년층의 자포자기는 도전정신의 실종으로 인한 ‘공시족’ 현상, 극심한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 문제, 주식 단타매매나 가상통화 등에서 보듯 세계 최고의 투기 성향 등을 낳았다. 장벽은 또한 사회적 갈등을 낳는다. 엄청난 격차와 장벽으로 가로막힌 갑과 을 사이의 갈등은 물론이고, 생존을 위해 과잉경쟁에 시달려야 하는 을과 을 사이의 갈등도 심각하다. 갈등과 경쟁이 넘쳐나는 사회 분위기 가운데서 갈수록 집단이기주의가 발호하고 있다. 이러한 장벽사회의 병리현상을 방치하고는 우리 경제의 활력을 되찾는 일도 요원할 것이다. 

 

이제 장벽을 낮추고 허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거대한 자산을 소유하고 상속하는 계층에게 그에 상응하는 세부담을 지우고, 늘어난 세수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공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 획기적인 조세개혁과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정부가 준비하는 종부세와 금융소득과세 개편안 등을 보면 획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교육분야도 마찬가지다. 장벽사회의 병리현상이 깊어가는 현실에서 더 이상 기득권자들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멈칫거려서는 안될 일이다.


경향신문 입력 : 2018.07.05 20:58:01 수정 : 2018.07.05 20:5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