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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세계일보> [데스크의눈] 지금 우리가 할 일, 좀 더 참고 견디자

글/김신성 문화체육부장

1차 세계대전 때 스페인독감은 / 전쟁보다 훨씬 더 큰 피해 입혀 / ‘절규’ 그린 뭉크도 질병과 사투 / 삶의 열정 한순간도 포기 안해


인류의 대표적인 재난은 전쟁과 전염병이다. 100여년 전 전쟁과 전염병이 동시에 세상을 덮친 적이 있다. 1914년 7월 발칸반도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대량살상을 야기했다. 1916년 7월 솜 전투에서 하루 만에 영국군 5만8000명이 희생당했다. 이 와중에 더 끔찍한 전염병이 전장을 엄습했다. 폐렴 증세를 보이다가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병이었다. 1918년 3월에 등장한 스페인독감이다. 그러나 이 병의 발원지는 스페인이 아닌 미국이며, 고병원성으로 발전한 곳은 영국 보호령이던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이다. 당시 유럽은 질병 보도에 소극적이었다. 영국은 로이드 조지 총리가 감염돼 사경을 헤맸지만 독일이 이를 알고 공세에 나설까 두려워 보도를 꺼렸다. 반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언론통제에서 자유로웠던 스페인은 이를 상세히 다루었다. 스페인 언론이 자주 노출하다 보니 다른 나라에서 이 병을 스페인독감이라 불렀다.

김신성 문화체육부장

스페인독감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을 휩쓸고 아시아까지 퍼져나갔다. 더 이상 전염병의 확산을 견딜 수 없었던 교전국들은 종전을 서둘렀다. 평화회의가 열리는 상황에서도 병의 위세는 맹렬했고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우리나라에까지 상륙한다. 1918년 그해가 무오년이라서 무오년독감으로 기록되었다. 9월 서울에서 첫 환자를 발생시키고 전국으로 확산했다. 충남 서산의 경우 인구의 대부분인 8만명이 이 병에 걸렸다. 들녘의 익은 벼를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여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해 12월 통계에 따르면 전국 인구 1680만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742만명이 감염되고 14만여명이 사망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종전을 재촉한 스페인독감은 세 차례나 더 대유행한 뒤 일단락되었다. 1차 세계대전 전사자는 무려 938만명, 부상자까지 합치면 3200만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스페인독감은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혔다. 감염자가 5억명에 이르렀고, 사망자는 최대 1억명으로 추정된다.

전율하면서 양손을 얼굴에 댄, 화면 오른쪽 아래 인물이 정면으로 관객을 쳐다보고 있다. 그의 해골 같은 얼굴에서는 공포에 찬 절규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흘러나온다. 한 번쯤 보았을 그림, 에드바르 뭉크(1863∼1944)가 그린 ‘절규’다.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도 50대 중반의 나이에 스페인독감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스스로도 살아남은 자신이 대견했는지 ‘스페인독감을 앓은 후의 자화상’이란 작품을 남겼다. 앞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림 속 노인은 몹시 힘들어 보인다. 뒷날 이 그림은 의사들의 감염학 교과서 표지에 실리기도 한다.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뭉크는 어릴 때부터 병약해 늘 감기를 달고 지냈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열다섯 살 때 누나도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남동생마저 급성폐렴이 앗아갔다. 여동생은 정신분열증으로 입원한다. 뭉크는 “가족에게는 병과 죽음밖에 없다. 그게 우리 핏속에 있어”라는 푸념을 적었다.

주변에서는 뭉크의 작품에 흐르는 우울하고 불안한 정서 때문에 그가 고흐처럼 젊은 나이에 자살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뭉크는 어려운 환경과 불행한 가족사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그림을 그렸다. 평생을 괴롭히던 천식도 이겨냈다.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리며 세상을 휩쓸던 스페인독감까지 극복해낸 뒤 여든 살 넘게 살았다. 삶을 가꾸려는 열정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힘든 시기가 길어지고 있다. 지겹고 답답하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개인위생을 준수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질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 좀 더 묵묵히 참고 견뎌내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3466687?lfrom=kaka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