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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의회’를 소집해 달라!

현안과정책 257호

글/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 교수)

  작년 12월 15일 원내 5당이 어렵사리 도출해낸 ‘선거제도 개혁안을 1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한다.’는 합의는 무산됐다. 거대 양당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거대 정당들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해가며 수십 년 내려온 ‘민주적 선거제도’의 개혁을 추진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선거제도 개혁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가능하다. 대통령이 나서면 된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이 문제를 전적으로 맡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럴 뜻이 없는 집권 민주당을 압박하여 선거제도 개혁 법안을 ‘패스트 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상정케 하거나, 또는 자유한국당과 협상하여 모종의 ‘빅딜’을 당장 추진해달라는 건 아니다. 지금으로선 그러기도 어렵겠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대통령은 그저 국민의 지혜와 힘을 모아주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시민의회’를 소집해 달라는 것이다. 시민의회 방식은 성공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건 결국 시민의 힘을 동원함으로써 국회가 ‘국민 무서운 걸’ 알고 개혁을 하도록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민의회를 소집함으로써 2020년에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2021년엔 권력구조 개헌을 성사시킨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87년 민주주의 체제의 마지막 대통령, 그리고 2020년 체제를 열어젖힌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희망이 있다.


1. 거대 양당만을 탓할 수도 없다.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의 소위 ‘야3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며 무기한 국회 농성에 돌입한 것은 작년 12월 4일이다. 손학규 대표와 이정미 대표는 단식에 들어갔으며, 정동영 대표는 청와대 앞 1인 시위나 거리 연설 등을 통해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심화․확산시켜갔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나서야 야3당의 요구에 나름 반응하기 시작했다. 물론, 단식과 농성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내 5당은 12월 15일에 ‘선거제도 개혁 관련 합의문’을 발표한다. 핵심 내용은 선거제도 개혁안을 ‘1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야3당 대표들은 그제야 단식을 풀고 시위를 중단했다.

  그러나 1월 임시국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종료됐다. 5당 합의는 무산된 것이다. 그렇다고 2월 임시국회가 조만간 열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직 일정 논의조차 잘 안 되고 있다. 설령 열린다 할지라도, 선거제도 개혁안이 2월 국회에서 합의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취한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면 그 두 거대 정당이 야3당이 원하는 만큼의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 도입에 갑자기 찬성할 리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거대 양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적극적일 까닭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의하면, 민주당은 37.8%, 자유한국당은 29.7%, 바른미래당은 6.8%, 정의당은 6.5%, 민주평화당은 2.3% 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2019/2/8). 거대 양당의 지지율은 야3당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다. 그런데 현행 선거법은 기본적으로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지역구 1등 뽑기 게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전국의 대다수 지역구를 거의 양분하다시피 하여 각자의 영역에서 1위 지위를 배타적으로 누리고 있는 양대 정당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제도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왜 이 (자기들에게) ‘좋은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하겠는가?

  물론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다소간의 변화와 차이는 있지만, 이 두 거대 정당(계열)은 대체로 각기 30~40% 내외의 지지율을 유지한다. 다수의 국민이 집중적으로 그 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정당은 아무리 잘해봐야 지지율 10%를 넘기기도 어렵다. 이 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국민적 기대와 지지를 무시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국회 의석을 가급적 많이 차지함으로써 우리를 지지하는 그 수많은 국민이 원하는 것들을 제공해줘야 한다. 국민에게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선거제도에 섣불리 손을 대선 안 된다. 그것은 자칫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치권력이 (우리보다 의지와 능력이 더 나을 것도 없는 저 야3당과 같은) 엉뚱한 세력들에게 ‘쓸 데 없이’ 분산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2. 이젠 대통령이 나서서 풀어야 할 문제임이 확실하다.

  (야3당 등과 같은 군소세력 보다는) 의지와 능력이 월등한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 국민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데,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그런 거대 양당을 마냥 탓하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거대 정당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해가며 수십 년 내려온 ‘민주적 선거제도’의 개혁을 추진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선거제도 개편은 언제나 시민사회의 개혁여론이 너무나 강하여 거대 정당들이 그 국민적 압박을 견디기 힘들 때에만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엔 그런 정도의 개혁 여론이 형성돼있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의 선거제도 개혁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가능하다. 대통령이 나서면 된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는, 지금 상황에선, 대통령만이 풀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선거제도 개혁의 문제, 즉 국회 개혁의 문제를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들여다보자. 우리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어려워 불안과 공포 속에 허덕이고 있는데, 막상 국회 안엔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별로 없다. 지역 기반 정당들, 이를테면 ‘영남당’과 ‘호남당’은 있을지언정, 유력한 ‘비정규직 노동자당’이나 ‘소상공인당’, 그리고 ‘청년당’ 등은 없지 않은가. 시민이 주인이라고 하는 ‘민주’국가의 대다수 주인이 정치적 대리인 없이 그저 방치돼있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런 나라를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사 대의제’ 국가의 시민들이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온갖 사회적 규범에 순종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안정적으로 유지해가길 바란단 말인가?

  하루라도 빨리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같이 약자를 포함한 주요 사회경제 집단의 정치적 대표성을 두루 보장해줄 수 있는 (국민 대다수에게) ‘좋은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서 국회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선호와 이익, 갈등과 대립 양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민의 대표 기구로 바로 서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급증, 청년의 불안과 좌절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심대한 사회경제 문제들을 정치적, 평화적,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그래야 목전까지 다가온 사회해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포용국가나 복지국가의 건설은 그런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이 선거제도의 개혁은 국가 공동체의 미래와 존망이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사회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는 특정 정파나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 국가 전체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정 정파나 집단이 아니라 국민 모두, 국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 주체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바로, 국민으로부터 대표권을 직접 부여받은 오직 두 정치 주체, 국회와 대통령이 나서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서 본 바와 같이, 국회는 현재 이 역할을 맡기 어렵다. 국회의 실질적 구성원인 제 정당들이 선거제도 개혁에 합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대통령만이 맡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인 동시에 국가의 원수이다. 선거제도 개혁 문제에 관하여 지금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은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이다. 일체의 정파적 고려는 삼가야한다. 민주당(정부)의 2020년과 그 이후를 생각해선 안 된다. 오로지 국민 전체와 대한민국의 미래만을 고민해야 한다.


3. 선거제도 개혁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론이기도 하다.

  다행히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은 문재인이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그는 2012년 4월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2012년 12월, 치열했던 당내 경선을 거쳐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되어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한국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또한,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였던 2015년 8월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당 혁신위원회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여 ‘권역별 소선거구-비례대표 연동제’의 도입을 공식 당론으로 채택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대선 때에는 그 권역별 연동제의 도입을 자신의 핵심 정치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 19일, 여야 5당 원내대표와의 공식 회동 자리에서 그는 국회가 진정한 민의 대변 기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선거제도가 개혁된다면 분권형 대통령제가 아니라 의원내각제로의 개헌도 가능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국회가 노력하여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를 들여오기만 한다면 대통령인 자신도 현행 대통령중심제를 의회중심제로 전환하는 것에 찬성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청와대가 2018년 3월에 발표한 정부 개헌안에는 '국회의 의석은 투표자의 의사에 비례하여 배분되어야 한다'는 조문이 포함되었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중시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명시된 것이었다. 2018년 8월 16일, 5당 원내대표와의 두 번째 회동에서는 "비례성과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편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말함으로써 야3당을 비롯한 원내 개혁세력에게 다시금 큰 힘을 실어 주었다.

  이젠 대통령이 직접 나설 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아마도 (비록 권역별 연동제의 도입이 자신의 대선 공약이긴 하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제도의 개혁이니만큼 그 문제는 국회 스스로가 알아서 해결해주길 기다려왔을 게다. 그러나 지금은 손학규 대표 측의 말마따나 ‘목숨까지 걸어가며’ 어렵사리 도출해낸 5당 합의마저 무산돼버리고 만 상황이다. 이제 더 이상 국회 합의에 의한 선거제도 개혁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을 전적으로 맡아 스스로의 힘으로 완수해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럴 뜻이 없는 집권 민주당을 압박하여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작성한 선거제도 개혁 법안을 ‘패스트 트랙’(fast track, 신속처리안건)으로 상정케 하거나, 또는 자유한국당과 협상하여 선거제도 개혁과 권력구조 개편을 맞교환하는 소위 ‘빅딜’을 당장 추진해달라는 건 아니다. 지금으로선 그러기도 어렵겠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대통령은 그저 국민의 지혜와 힘을 모아주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를 소집해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시민의회 방식을 통해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한 예는 캐나다나 네덜란드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의회’를 소집해 달라.

  대통령 직속 기구인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의회’의 운영 방식은, 그 골자만 추려본다면,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대통령은 국회의원 수와 동일한 300인의 시민을 선발하여 그들을 시민의원으로 임명한다. 이때 특정 이념이나 가치로부터 시민의회의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시민의원은 성별, 연령별, 지역별 분포만을 고려하여 추첨에 의해 무작위로 선정하되, 그 추첨은 300명이 다 채워질 때까지 계속된다.

  둘째, 시민의원은 적절한 보수를 받으며 9개월 간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이되, 첫 3개월은 학자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주요 선거제도의 정치 및 사회경제적 효과에 대해 학습하고, 두 번째 3개월은 대기업, 중소상공인, 노동자, 청년, 여성, 환경 단체 등과 같은 주요 사회경제집단들로부터 현실의 삶과 관련된 그들의 정치적 견해나 의견 등을 청취하며, 마지막 3개월은 대통령이 제시한 대안 선거제도들 가운데 어느 것을 시민의회 개혁안으로 제출할지를 여러 단계의 내부 토론을 거쳐 선택한다. 이때 대통령이 제시하는 대안들은 주요 정당들이 당론으로 내놓은 선거제도 개혁안을 잘 분류하여 작성한 것이면 충분히 바람직할 것이다. 가령 야3당이 총의석 360석의 ‘순수 연동제’, 민주당이 총의석 330석의 ‘유사 연동제A’, 자유한국당이 총의석 300석의 ‘유사 연동제B’를 당론으로 공식화하면, 대통령이 그 세 가지 개혁안을 시민의회에 대안으로 제시하고 시민의원들로 하여금 그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셋째, 시민의회 개혁안이 확정되면 대통령은 그것에 기초하여 선거제도 개혁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국회가 그 개혁안의 도입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도록 한다. 이때 국회의원들은 공개 가부투표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한다.

  선거제도 개혁을 이와 같은 시민의회 방식으로 추진하면 국민이 원하는 정도의 비례성이 장착된 선거제도가 도입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무엇보다 시민의회 회기 중에 선거제도에 관한 정치정보가 시민의원은 물론 일반국민 사이에도 널리 확산될 것이며, 그만큼 시민사회의 개혁여론은 고조될 것이고, 따라서 거대 양당도 적어도 그만큼은 국민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시민의회 방식이란 결국 시민의 힘을 동원하자는 것이다.

  선거제도에 관한 정치정보의 확산은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에 반대하는 측의 ‘반개혁 공세’로부터 촉발될 공산이 크다. 1990년대 중반,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1년가량 앞둔 뉴질랜드의 개혁 정국에서도 ‘정보 투쟁’을 먼저 벌인 쪽은 개혁으로 인한 기득권 상실 혹은 축소를 우려한 반개혁 세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필경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게다. 예컨대, 주요 방송과 신문 등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층은 그 언론매체들이 (순수)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안 되는 이유 등을 연일 보도하도록 자신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학자와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글, 강의, 연설, 설교, 예술행위 등으로 선거제도 개혁 반대 여론을 조성하는 데에 기여케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들의 자금 동원력을 발휘하여 개혁 반대운동을 위한 거대한 상설 단체까지 설립할지도 모른다. 그 경우 길거리 시위는 나날이 늘어날 것이고, 반개혁 구호는 점점 더 과격해질 것이며, 집회 양상도 계속 격렬해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기득권층의 개혁 반대운동이 나름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활발하게 일어나면 개혁 찬성운동 역시 그것에 자극을 받아 활기를 띠게 되리라는 점이다. 이는, 예를 들면, 일부 재벌과 대기업이 전면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거세게 반대하면 그를 수상히 여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과거에 없던 관심을 갖고 선거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그 결과 선거제도의 비례성 강화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개혁운동을 지지하거나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방식의, 일종의 사회운동 확산 패턴이 작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사회경제집단들이 이처럼 선거제도 개혁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져 서로의 의견과 주장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경쟁적으로 쏟아놓게 되면 선거제도 그 자체는 물론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각종 정보가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확산돼가기 마련이다. 일반시민들은 일단 양측이 왜 그토록 격렬하게 대립하는 지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며, 그것은 차츰 선거제도에 대한 호기심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런데 그 호기심을 채워줄 정보는 상기한 대로 주변에 넘쳐나게 돼있다. 종이와 인터넷 신문,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과 인터넷 방송 등이 거의 매일 관련 정보들을 풍부하게 실어 나를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제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 시민들은 그걸 자랑이라도 하듯 주변에 알려주거나 혹은 서로 교환할 것이다. 그러면서 종국엔 각자가 자기 나름의 견해와 선호를 갖게 될 것이다. 개혁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충돌이 사회 전체에 정보를 확산시키고, 그것이 점점 더 많은 시민들로 하여금 찬반 논쟁에 참여케 하리라는 것이다.

  장장 9개월에 걸쳐 이러한 양상으로 선거제도에 관한 정치정보가 확산되고 유통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개혁 찬성 여론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 구성원의 압도적 다수는 정규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상공인, 청년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이다. 그런데 그들 약자의 눈과 귀에 일상적으로 아주 쉽고 편하게 들어오게 된 각종 정보는 대부분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높아지면 약자를 대표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세와 규모가 증대되어 자신들이 선호하는 (예컨대,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건설에 도움이 되는) 정책과 법이 제때에 충분히 제공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일러준다.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억울한 문제,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문제, 불안한 문제 등이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으로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다고 하는데, 게다가 현실에서도 스웨덴,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등과 같은 세계적 복지국가는 모두 순수 비례대표제 국가라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약자가 선거제도 개혁을 찬성하는 것,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 개혁 찬성파가 증대돼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시민의원들의 개혁 선호도는 대개 일반시민들의 경우보다 더 높게 형성될 것이다. 시민사회의 드높아진 개혁 여론이 시민의회 의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의원들이 각기 3개월씩 선거제도를 제대로 학습하고 사회경제적 현실을 간접적이나마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거제도의 다양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선거제도의 변화에 따라 사회경제적 상황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충분히 숙지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3개월을 단일 의제에 대한 집중적 토론으로 심도 있게 보낸다. 가히 집단지성이 발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에서 9개월을 지낸다는 것이다.

  국민 가운데 무작위 추첨에 의해 선발된 300명의 시민의원들이 9개월의 숙고 끝에 골라낸 선거제도 개혁안을 대통령이 정부 입법안으로 전환하여 국회에 제출했을 때, 그리고 더군다나 그 내용이 시민사회의 개혁여론에 부응하는 것일 때, 그런 안을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가 거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거대 양당도 더 이상은 그렇게 동원된 시민의 힘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게다. 집권 민주당은 더욱 더 그러할 게다. (게다가 민주당 의원들이 자당 출신 대통령이 제출한 선거제도 개혁안에 공개적으로 부표를 던지기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6. 87년 승자독식 체제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기록되시라.

  민주당만이 아니다. 잘만하면 대통령은 자유한국당의 상당수 의원들도 가표를 던지게 만들 수 있다. 대통령이 (상기한 5당 원내대표와의 첫 회동 자리에서 말했던바 그대로) 선거제도 개혁 법안의 국회통과가 확실해지면 바로 그 후속 과제, 즉 권력구조 개편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하는 경우를 상정해보라. 그 조건부 개헌 약속은 상당수의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시민의회 개혁안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는 유인으로 작동할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대통령이 시민의회를 소집하여 4월부터 12월까지의 9개월간 선거제도 개혁안을 도출해내도록 하면, 내년 1월에는 그 안을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칠 수 있으며, 그리고 그때 대통령 덕분에 야3당 의원들은 물론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상당수 의원들까지 가표를 던지게 된다면, 2020년 4월 15일 총선은 그 새로운 선거제도로 치러질 수 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대통령이 다시 권력구조 개편 작업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2021년의 어느 시점에 분권형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22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민주주의, 즉 합의제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꿈꾸는 포용국가는 바로 그 합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제대로 세워질 수 있다. 생각해보라. 포용국가는 약자와 소수자를 품어주는 공동체다. 약자와 소수자의 선호와 이익을 대변하는 '포용의 정치'가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국가다. 포용의 정치가 작동함으로써 약자를 껴안고 함께 가는 포용경제와 포용사회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포용의 정치는 약자와 소수자를 대표하는 정치세력, 즉 약자와 소수자를 대표하는 유력 정당들이 입법부와 행정부에 상존해야 제대로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비례성을 보장하는 선거제도와 연립정부를 제도화하는 권력구조를 도입해야 할 이유이다. 그 두 가지 정치제도를 양대 축으로 하는 합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시민은 포용국가 구상이 실현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 대통령의 임기 중에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모두 그것이 장기 과제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임기 중에 해야 할 일은 포용국가의 내용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채워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건설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만드는 일, 즉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구축이다. ‘배제의 정치’가 작동하는 지금의 승자독식 체제에서 포용국가가 발전할 리는 없다. 포용의 정치가 작동하는 합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먼저 수립해야 한다. 그것은 선거제도의 개혁과 권력구조의 개편을 요하는 작업이다. 시민의회 방식으로 2020년에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2021년엔 권력구조 개헌을 성사시킨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87년 민주주의 체제의 마지막 대통령, 그리고 2020년 체제를 열어젖힌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