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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자경주의(digital vigilantism) 시대의 미디어 :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과 일그러진 정의

현안과정책 365호

글/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한강 대학생 손정민씨 사망 사건에서 보듯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가 작동하는 인터넷 공간의 특성이 디지털 공론장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제한된 자원으로 많은 주목을 빠른 시간 내에 획득하기 위한 선정주의 전략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의혹을 생산하는 미디어가 많은 주목을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주목 경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의 디지털 자경주의(digital vigilantism) 문화와 관련이 있다. 디지털 자경주의는 규범을 어기거나 물의를 일으킨 행위자에 대해 네티즌들이 온라인상에서 자발적으로 응징이나 보복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이 제도적 절차를 통해 해소될 것으로 기대되지 않을 때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행동주의에 매몰된다. 논란을 확대재생산하는 포털 뉴스와 유튜브 채널들은 디지털 자경주의에 기생하며 논란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언론과 유튜브를 탓하는 것만으로는 불필요한 논란을 막기 어렵다. 결국 시민들이 바뀌어야 한다


미국의 정치가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은 오래전 한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누구나 자기만의 의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기만의 사실을 가질 수는 없다(Everyone is entitled to his own opinion, but not his own facts).”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자기만의 사실’을 갖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시민들은 본인의 믿음이 그 어떤 사실보다도 우선하는 ‘포스트-진실(post-truth)’의 세계로 떠났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기. 이것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이제 ‘자기만의 사실’을 갖는 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만의 사실이 ‘모두의 사실’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의 믿음을 객관적 사실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자신과 다른 사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공격하고 세상을 자신의 믿음대로 바꾸려 한다.

이러한 ‘포스트-진실’ 행동주의자들의 선구가 2010년의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였다면, 2021년 최신 버전은 ‘반진사(반포 한강사건 진실을 찾는 사람들)’다. 한강공원에서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된 고(故) 손정민 씨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을 규명하겠다고 나선 이들이다. 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모인 회원 수는 3만 명이 넘는다.

‘반진사’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네티즌 수사대’의 주장은 이렇다. ‘손씨는 살해당했으며, 범인은 함께 술을 마신 친구 A씨다. 그러나 경찰은 부실 수사를 통해 A씨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이유는 A씨가 경찰 또는 언론사 고위 간부의 아들 또는 친인척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증인들이 있지만 A씨를 비호하는 세력은 이들을 매수하여 증거를 은폐하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지난달 27일 내놓은 ‘한강 대학생 사망사건 관련 그간 수사진행사항’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반진사’가 제기한 의혹들이 사실과 다름을 조목조목 밝혔다. 경찰은 이례적으로 A4 용지 23쪽 분량의 보고서를 누구나 찾아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하며 논란이 가라앉기를 기대했다. 유감스럽게도 헛수고였다.

지난달 29일에는 미제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 탐사 다큐멘터리의 ‘레전드’라 할 수 있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손씨 타살 가능성이 낮으며 네티즌들이 과도한 억측을 하고 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사건 초기 “‘그알’이 나서 달라”던 시민들은 방송이 나간 뒤 “이제 ‘그알’도 거른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아니라 ‘그것이 덮고 싶다’”라며 프로그램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수사기관과 지상파 방송사가 타살 혐의점이 없다고 말해줘도 시민들의 고집과 열정을 꺾기에는 역부족이다. 경찰은 조만간 사고사로 사건을 종결할 것으로 보이지만, 적지 않은 시민들은 진실을 찾는 ‘투쟁’을 계속 벌일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와 시민이 함께 만드는 ‘의혹의 콜라보’

‘방구석 탐정단’은 외롭지 않다. 이들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미디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의문을 품으면, 포털사이트에는 이걸 ‘의혹’으로 포장하는 언론이 있다. 그리고 이 의혹을 요리하여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유튜버가 있다. 언론 기사와 유튜브 채널을 본 시민들의 마음 속에서 의문은 확신으로 탈바꿈한다. 시민, 포털 뉴스, 유튜브 채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논란은 확대재생산된다.

포털에는 근거도 없이 온갖 의혹을 퍼나르는 함량 미달의 기사들이 넘쳐난다. KBS의 저널리즘 비평 프로그램 ‘질문하는 기자들 Q’ 제작진과 팩트체크 전문미디어 ‘뉴스톱’이 손씨 사건 관련 언론 보도량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손씨 실종 소식이 처음 알려진 4월 28일부터 5월 21일까지 출고된 기사는 모두 1,620건이었다.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에 등록된 54개 주요 언론사에 한정한 분석 결과이기 때문에 군소 인터넷 언론사들의 기사까지 합치면 이보다 몇 배 더 많은 기사들이 포털 공간을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포털에 기사를 공급하는 언론사들보다 더 돋보인 건 선정적 제목을 달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유튜버들이다. ‘친구 A씨가 손씨를 업고 가는 장면이 CCTV에 찍혔다’, ‘경찰이 인양 과정에서 손씨 시신을 마네킹과 바꿔치기했다’, ‘서울경찰청장의 아들이 사건에 연루돼 있다’와 같은 황당한 가짜뉴스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이버 렉카(교통사고 현장에 발빠르게 나타나는 견인차처럼 이슈가 생기면 재빨리 관련 영상을 만들어 조회수를 올리는 유튜버를 이르는 신조어)’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영상 1편당 수십만 조회수를 올린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취재한 한 시민이 “우리는 유튜브만 믿어. 유튜브가 진실이야!”라고 부르짖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통과 권위를 갖는 기성 언론사들은 손씨 사건과 관련해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유튜버들을 손가락질하지만, 이들이라고 해서 비판할 자격이 충분한 건 아니다. ‘질문하는 기자들 Q’ 제작진은 자사인 KBS를 포함해 연합뉴스, YTN, 서울신문 등 레거시 미디어들도 유튜브에서 손씨 사건과 관련해 의혹을 부채질하는 자극적 제목의 영상을 올려 조회수를 올린 사실을 확인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성 언론도 유튜브에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주목 경제 시대의 전략, 선정주의

디지털 공론장이 이렇게 혼탁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돈 때문이다. 인터넷은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정보가 희소하던 시대에 정보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상품이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정보 과잉의 시대에 희소성을 잃은 정보는 더 이상 가치를 갖지 않는다. 오로지 가치를 갖는 것은 넘쳐나는 공급과 비교할 때 희소한 재화가 되어버린 이용자들의 주목이다.

이제 주목이 화폐로 교환되고 관심을 받는 자만이 경제적 보상을 얻는 시대가 열렸다. 구독자수와 조회수가 수익을 결정한다. ‘구독’과 ‘좋아요’를 많이 받은 유튜브 채널일수록 높은 광고 수익을 올리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에게 협찬이 몰리는 이유다. 뉴스 미디어라고 다를 바 없다.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는 언론사보다 클릭을 통해 페이지뷰를 많이 올린 언론사가 돈을 버는 구조다.

이용자의 관심을 붙잡기 위한 정보들 간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콘텐츠들이 자기를 좀 봐달라고 아우성이다. 경쟁의 정글 속에서 제한된 자원으로 많은 주목을 빠른 시간 내에 획득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선정주의(sensationalism)다. 인터넷 언론사들이 낚시성 제목과 실시간 검색어를 이용한 어뷰징에 중독된 것도, 유튜브 영상의 제목과 썸네일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것도 주목 경쟁의 생리 때문이다.

특히 고단수 ‘관종’들은 타깃 수용자들이 혐오하는 대상을 악마화(demonization)함으로써 손쉽게 주목을 얻는 ‘희생양 전략’을 구사한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또는 사회적 소수자 집단을 먹잇감으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이라면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없다.

주목 경쟁을 위한 이달의 희생양은 친구 A씨였던 것이다. A씨를 권력의 비호를 받는 살인범으로 만들어 몇몇 유튜버들은 구독자수와 조회수를 만족스러울 만큼 늘렸다. ‘조리돌림’을 통해 충분한 조회수를 올리고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하이에나들은 다음 희생양을 찾아 떠난다. 누가 다음 제물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내가 표적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디지털 자경주의의 ‘비뚤어진 정의’

그러나 주목 경제의 개념만으로는 이 기묘한 문화 현상에 대한 절반의 해답만 제공해줄 뿐이다. A씨를 향한 ‘마녀사냥’이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일 만큼 대중의 주목을 끌어모을 수 있게 된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A씨를 때리면 주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대중의 왜곡된 정의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 대중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뜨겁게 분노하고 있다. 이들이 입 모아 요구하는 것은 ‘공정함’이다. 기득권 엘리트의 반칙과 특권을 해체하고, 부정과 ‘갑질’을 응징함으로써 좌절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본래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는 공적 영역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 저신뢰 사회인 한국에서 국회·언론·법원·검찰·경찰 등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기고 있다. 수사기관은 정보를 은폐·조작하고 사법기관은 면죄부를 주기에 바쁘다는, 다소 과장된 문제의식이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이 제도적 절차를 통해 적절히 해소될 것으로 기대되지 않을 때 시민들의 강렬한 감정은 스스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행동주의로 귀결된다.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과 무엇이든 찾아내는 검색 엔진,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소셜미디어가 무기다. 여기에 촛불을 들어 최고 권력자까지 권좌에서 몰아낸 역사적 경험이 시민들의 자신감을 한껏 북돋워주었다.

이제 디지털 기술로 상호연결된 능동적 시민들은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니는 ‘자경단(自警團)’을 이뤄 잘못된 것을 직접 바로잡고자 한다. 규범을 어기거나 물의를 일으킨 행위자에 대해 네티즌들이 온라인상에서 자발적으로 응징이나 보복을 하는 행위를 디지털 자경주의(digital vigilantism)라 부른다. 표적의 신상을 공개·공유하여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망신을 주는 것은 기본이고, SNS 계정에 욕설 댓글과 메시지 보내기, 학교나 회사에 징계·처벌·해고 청원하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응징이 이뤄진다.

본래 자경주의(vigilantism)는 경찰 등 국가의 공식 치안·수사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개인이나 단체가 그 기능을 대신하여 재산과 안전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한 데 기원이 있다. 공적 수사기관과 사법제도가 부재하던 시절에 사적 영역에서 범인의 검거와 징벌을 수행했던 역사가 21세기 사이버 공간에서 부활한 것이다.

대중의 분노를 해소하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순기능이 있긴 하지만, 디지털 자경주의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근대적 사법체계가 사적 제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유에서다. 나름의 정의감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지극히 주관적이고 임의적으로 설정된 ‘정의’의 기준으로 벌이는 자의적 심판과 적법한 절차가 누락된 직접적 징벌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집단지성보다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쉬운 디지털 자경주의는 종종 끔찍한 혼란과 억울한 피해를 양산한다. 2013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테러 당시 소셜미디어 레딧 이용자들은 애꿎은 대학생을 테러 용의자로 지목해 죽음으로 몰고 갔다. 성범죄자 신상을 공개해 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디지털 교도소는 엉뚱한 사람을 성범죄자로 낙인찍어 물의를 빚었다. ‘기레기’를 혼내준다며 기자들을 향하여 악성 댓글과 메일을 보내는 온라인 트롤링(online trolling)은 젠더 이슈를 다루는 여성 기자들을 향한 여성혐오적 분풀이로 이용되고 있다.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 이후 펼쳐진 광기 어린 현상들은 디지털 자경주의의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손씨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이들 행동의 배경에도 진실을 바라는 정의감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A씨를 살인범으로 내몰아 집요한 공격을 퍼붓는 과정에서 A씨의 인권이나 사실에 바탕을 둔 증거 따위는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쁜 놈이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내도 된다’는 일그러진 정의감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다. 주목에 굶주린 미디어들은 곰팡이처럼 이 그림자 속에 디지털 자경주의를 숙주 삼아 기생한다.

‘반진사’가 요구하는 진실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진실, 상상된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과 언론에서 아무리 그것이 허구임을 알려주어도 그들은 끝내 믿지 않을 것이다. A씨의 친인척이 경찰 고위간부라고 믿는 등 공적 제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싹튼 이들의 음모론이 공적 제도의 힘으로 교정될 리 없다.

사고가 수습되면 렉카들이 사고 현장을 떠나듯, 시간이 지나 주목도가 떨어지면 ‘사이버 렉카’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다음 희생양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러나 ‘타진요’ 커뮤니티가 아직도 활동 중인 것처럼, 시민들은 계속 ‘자기만의 사실’이 만든 감옥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킬 가능성이 높다. 포스트-진실 사회의 웃지 못할 풍경이다.


시민들이 바뀌어야 한다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에 관한 대다수 비평은 인터넷 언론과 유튜브 채널의 반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너무나 뻔히 보이는 디지털 시장에서 도덕적 훈계만 늘어놓는 건 다소 공허해 보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러한 방식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만드는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디지털 자경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일련의 현상들은 디지털 자경주의와 주목 경제의 상호작용 속에서 미디어와 시민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인터넷 언론사와 유튜버를 냄새나는 하수처리장으로 규정하고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결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자경주의에 도취된 시민들도 공범이다. 주목을 모아주는 디지털 자경단이 존재하는 한 이들에 기생하는 미디어들은 계속 똑같은 행태를 반복할 것이다. 기생할 숙주 자체, 즉 디지털 자경주의 문화와 시민들이 결별해야 언론과 유튜브도 바뀔 수 있다. 결국 시민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간 우리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는 시민의 자율성과 창발성에 찬사를 보내는 데 익숙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자유롭고 능동적인 네티즌이 없었다면 촛불혁명을 비롯한 정치적·문화적 진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가져올 미래 정보사회에 대한 장밋빛 낙관주의가 무너진 시점에서 디지털 시민문화의 양지와 음지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자경주의 네티즌에게 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 네티즌 문화의 문제를 직시하고 비판의 초점을 네티즌에 맞춰야 한다.

전통적 언론이 맡아야 할 역할도 있다. 포스트-진실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제도는 현재로선 전통적 언론밖에 없다. 인터넷 역사 초기에 발랄하고 경쾌한 뉴미디어 언론의 새로운 역할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았다면, 뉴미디어가 주목 경쟁에 매몰된 지금은 레거시 미디어 언론의 차별적 역할이 소중해진 시점이다.

전통적 언론은 더 이상 유튜브를 쫓아가려 해선 안 된다. 다른 미디어들과 달리 전통적 언론만이 수행할 수 있는 대체불가능한 특장점에 집중해야 한다. 사실을 철저히 확인하고 검증하는 역량이야말로 전통적 언론의 대표적 비교우위 요소다. 퀴즈 프로그램 출연자가 무엇이 답인지 알 수 없을 때 ‘전화 찬스’를 활용하듯, 언론은 무엇이 사실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중이 마지막에 믿고 참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유튜브가 진실이야!”라는 시민의 일성을 “언론이 말하는 게 진실”이라는 튼튼한 믿음으로 어떻게 바꿔낼 수 있을까. 언론의 몫이 크지만, 언론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유튜브와 시민의 ‘의혹의 콜라보’를 전통적 언론과 시민의 ‘신뢰의 콜라보’로 바꾸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