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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3.0시대를 향하여 ‘책임론적 화해’에서 ‘포용론적 화해’로

현안과정책 331호

글/박홍규(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8년 10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파국을 향해 질주하던 한일관계가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췄다. 인류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한일 양국은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냥 이 상태로 한일관계가 동결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사라지기도 전에 시한폭탄과 같은 대법원 판결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8월 4일부터 공시송달의 효력이 발생하여 일본기업의 자산 현금화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명백하다. 양국의 상호 보복과 양국민의 감정 격화로 한일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심연에 빠져버릴 것이다.

악화되는 한일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일관계를 차마 볼 수 없어서, 한일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금 당장 시행해야 할 구체적인 사항들을 제언하고 있다. 한일 양국의 지도자는 결단을 내려 이 제안들을 수용하고 실행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추가하기 보다는 지난 시대의 한일관계를 회고해보고 새로운 시대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전망해보고자 한다.


한일관계 1.0시대

나는 앞으로 한일 양국이 만들어갈 새로운 시대를 ‘한일관계 3.0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으로 시작된 한일관계는 좀처럼 정상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5년 청구권협정을 통해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65년체제’라고 불리는 이 시대가 한일관계 1.0시대다.

1.0시대를 여는 데 20년이나 걸린 이유는 지난 시대를 청산․정리하는 데 양국 간에 커다란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에게 ‘최대책임’을 요구했고, 일본은 ‘최소책임’으로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해 피해자인 한국이 원하는 만큼 일본이 최대한의 책임을 질 것을 한국은 주장했고, 이에 반해 일본은 현실적인 국제체제․국제법의 틀 안에서 책임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결국 미국의 압박적 중재를 배경으로 한일 양국은 타협했다. 양국 모두 흔쾌하지 않은, 특히 한국으로서는 불만스러운 타협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평가와 청산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의 사죄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타협은 ‘소극적 타협’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많은 제약점을 갖고 있는 소극적 타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협정을 통해 양국은 ‘화해’했고, 이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갔다.


98년 한일공동선언과 한일관계 2.0시대

2.0시대는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국제적으로 냉전이 종식된 상황을 배경으로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일관계에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 기적처럼 일어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한일파트너십공동선언’을 체결했다.

이 선언문은 먼저 양국 정상이 일본에서 회담을 갖게 된 경위를 말하고, 이어서 이 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양국 정상은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구축되어 온 양국 간의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구축한다는 공통의 결의를 선언하였다.”라고 천명했다. 한일관계 1.0시대에 이룬 우호협력 관계를 기반으로 앞으로 2.0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선언문의 다음 조항에서는 이 선언의 철학적 기초를 담았다.

“오부치 총리는 금세기 한․일 양국 관계를 돌이켜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하였다.”

오부치 총리는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반성’과 ‘사죄’로 표명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의 책임 표명을 수용하여 ‘화해’와 ‘협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화답했다. 이를 도식화하자면, ‘가해자 일본의 사죄->피해자 한국의 용서->양국의 화해 성립’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책임론적 화해 이론이고, 양국 정상의 공동선언은 책임론적 화해 이론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 선언을 계기로 65년체제가 막을 내리고 ‘98년체제’, 즉 한일관계 2.0시대가 열렸다.

98년의 공동선언 또한 시대적 필요에 의한 양국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으나, 이 타협은 65년의 소극적 타협과는 달리, 양국 정상이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흔쾌한 마음으로 체결한 ‘적극적 타협’이었다. 65년의 청구권 협정에서 다루지 못한 가해자 일본의 사죄와 피해자 한국의 ‘용서’를 공동선언문에 담아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청구권협정에서 유보되었던 최대책임을 일본에게 기대했고, 일본은 65년에 보여준 최소책임에서 벗어나 한국이 기대하는 최대책임에 성의를 갖고 임했다.


책임론적 화해의 한계

공동선언의 부속서에는 43개 항목에 이르는 구체적인 행동계획이 마련되었고, 이후 다 분야에 걸쳐 한일관계가 비약적으로 개선, 발전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한일 화해의 길이 장애물에 부딪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과서 왜곡, 영토문제, 야스쿠니참배, 위안부 문제 등이 98년 공동선언의 정신을 위협하는 갈등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일본에게 기대했던 최대책임은 배신감으로 돌아왔고, 일본이 보여준 최대책임에의 성의는 소멸되어버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본의 보수 우경화에 따른 아베정부의 역사인식을 최소책임으로의 퇴행으로 간주한 한국의 피해자와 피해자지원단체는 ‘극단적인’ 최대책임을 주장했다. 그들은 공동선언에서 양국 정상이 확인한 사죄와 용서, 그리고 그에 따른 한일관계의 증진을 부정하고,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진정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문제로 부각시켜 국제사회에 이슈화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15년 한국의 박근혜정부와 일본의 아베정부는 양국을 넘어서 국제적 이슈로 부각된 위안부문제를 종식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정부간 합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합의는 양국 정부의 미숙한 후속 대응과 위안부 피해자와 피해자지원단체의 반발로 인하여 파행을 거듭하다가 문제인정부에 들어서 형해화되고 말았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렵게 도달한 양국간 합의가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2018년 10월 이번에는 강제동원피해자(징용자) 문제가 현안으로 부상했다. 위안부 합의의 형해화로 악화된 한일관계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더욱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한일 양국이 해법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양국간의 갈등은 확대되어 갔다. 2019년 8월 7일 일본은 한국을 백색국가(White List)에서 삭제하는 경제 제재 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맞서 한국은 8월 23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종료 의사를 일본에 통보했다. 이로써 군사․안보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갈등 대립의 확대 과정 속에서 양국 정부와 정치인, 그리고 언론은 자국의 입장에서 상대의 책임을 추궁하고, 그에 따라 국민들의 반일․협한 의식과 행동도 증폭되었다. 마침내 2.0시대를 열었던 공동선언의 철학적 기초인 책임론적 화해는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 양국의 강경론자들이 주고받는 책임 공방을 보면 1.0시대의 거리보다 더 벌어져 버린 듯하다. 책임론적 화해는 수명을 다한 듯하다.


포용론적 화해

코로나19는 한일 양국에게 화해하고 협력하라는 명령을 전하고 있다. 양국은 3.0시대를 열어야 하는 준엄한 국면에 도달해 있다.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담을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제시하고, 그와 동시에 3.0시대를 받쳐줄 철학적 기초를 확보해야 한다.

최근 이러한 시대적 사명에 반응하여 일본 지식인들은 지난 9월 18일 아베 총리가 퇴진을 표명한 것을 계기로 아베 정책의 전환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은 적이 아니다: 이제 한일 관계 개선을」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로 총 110명이 동참했다.

성명서에서는, 일본 정부가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국제법 위반’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에게 1965년에 체결한 한일조약(및 청구권 협정)을 준수할 것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악화된 한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이 대립을 해결하는 관건을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2018년의 대법원 판결을 법치국가인 한국정부가 부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일본 정부는 민사소송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인한 다음,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정신에 입각하여 기한을 두지 않고 성실하게 역사를 직시하고, 겸허히 피해자 및 피해자지원단체와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독일에서 이루어진 해결 방안을 참조하여 피고 기업 등을 중심으로 자금을 출연하여 재단을 설립해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성명서의 마지막에서는 한반도, 일본 열도와 류큐 열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한 운명으로 이어진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을 식민지 지배한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 영원한 과제이며, 일본과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상생하고, 상부상조하고, 성실히, 겸허히,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며, 서로 신뢰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구축해 나가자고 호소하고 있다.

한일관계가 절박한 상황에 이른 현 시점에서 이러한 일본 지식인의 성명서 발표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성명서가 98년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책임론적 화해 이론에 기반하여 2.0시대를 열었던 한일 공동선언은 이제 시대적 사명을 다하여 지금의 엄중한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다. 나는 3.0시대를 향하여 좁혀지지 않는 자신의 일방적 주장을 반복하는 책임론적 화해를 넘어서는 철학적 기초를 모색하고자 한다. ‘포용론적 화해’다.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날까지의 한일관계를 거시적으로 보면, 선발 후발의 차이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깊은 상처를 수반했지만, 지금은 세계적 수준의 문명국 관계에 도달해 있다. 코로나19는 인류의 삶에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서로를 포용하고 협력하며 그 요구에 응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며, 미래의 번영을 공유하는 길임이 틀림없다.


문희상 안과 한일관계 3.0시대

작년 12월 18일 문희상 국회의장이 강제징용 해법으로 대표 발의한 「기억․화해․미래재단법안」은 포용론적 화해에 기반하고 있다. 문희상 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억․화해․미래재단’을 설립하여 국외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위자료 지급, 추도․위령사업,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조사․연구 등을 수행한다.

둘째, ‘위자료’는 국외강제동원 기간 중에 있었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상응하는 금전이다.

셋째, 재단이 설치하는 기억․화해․미래기금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기업․개인 등의 기부금으로 재원을 조성한다.

넷째, 재단이 위자료를 지급하면 이는 제3자 임의변제로서 해당 피해자의 승낙을 받아 재단이 채권자대위권을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섯째, 해당 위자료를 지급받은 피해자는 확정판결에 따른 강제집행 청구권 또는 재판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

요컨대 한국이 주도하여 재단을 설립하고 한국과 일본의 기업과 개인으로부터 기부금으로 모집하여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함으로써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다뤄지지 않은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다는 내용이다.

이 발안이 갖고 있는 의미는 지난날 나라를 빼앗기고 국민을 고통에 빠뜨렸던 역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한편, 오늘날 높아진 국가 위상에 맞게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이다. 이 발안은 기존의 책임론적 화해의 틀(‘가해자의 사죄->피해자의 용서->화해의 성립’)을 넘어서, 새로운 화해의 틀에 기반한 창의적인 해법을 제안하고 있다. 즉 98년 공동선언에 담겨진 사죄 이외에 또 다른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지 않고, 피해자의 선제적이며 주도적인 재단 설립을 통해 양국간의 화해에 이르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가해자의 입장을 피해자가 포용하는 화해이다.

포용은 일본의 최소책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원하는 일본의 최대책임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으로서의 화해론이다. 책임 추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포용을 통한 화해로 미래를 개척하는 담대한 도전이다.

한국에서 제시한 해결안 중에서 아직 일본이 명시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안이 문희상 안이다. 비록 지난 20대 국회에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문희상 안이 21대 국회에서 가결된다면 한일관계 3.0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