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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을 넘어 정의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한국 사회

현안과정책 314호

글/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최근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요구가 주목받으면서 한국 사회 특유의 방식으로 “공정성 담론”이 형성되어 왔고, 때로는 공정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와 함께 많은 이들이 “평등, 공정, 정의”를 언급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 가치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부족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정”은 기본적으로 비교의 원칙(혹은 비례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나의 노력 수준”과 “남의 노력 수준”을 비교해서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이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에서 수립되는 정의의 관념을 비교적 정의(comparative justice)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비교 불가능한 정의(noncomparative justice)의 영역이 있다는 점 또한 상기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동시에 개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비교에 근거하지 않은 정의의 모델이 필수적이다.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단어 중의 하나는 바로 “공정성”일 것이다. 일상적 대화 속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공정성 감각” 혹은 “청년 세대가 보여주는 공정성에 대한 민감도” 같은 문구가 (마치 모두가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현상은 무척 흥미롭다. 공정성은 대학 입시를 비롯한 교육 문제, 취업 경쟁과 상대적 박탈감, 기업 및 정부 기관에서 여전히 목격되는 부당한 관행 등과 같이 구체적 사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논의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사회에서 좀더 보편화되어야 할 상위 가치로서 다분히 추상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올해 3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30세대”의 민원이 지난 해 전체 민원의 50.2%를 차지했으며, 특히 “교육, 시험, 채용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개선 요청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1) 국민권익위원회는 “공정에 대한 청년들의 높은 기대와 요구를 잘 알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반영해 앞으로 “청년체감 공정과제”를 중점적으로 발굴하고 관련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올해의 목표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공정의 잣대를 적용해보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개선과 변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법 체계, 고용 절차, 혹은 직장 생활에서 경험하는 보상과 승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이들이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신을 토로한다. 사람들이 왜 “공정하지 않다”고 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테마는 여전히 수 년째 반복중이다. 그래서인지 때때로 공정성은 마치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최우선 가치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현 정부도 “평등, 공정, 정의”를 핵심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공정성은 정확히 어떤 가치를 뜻할까? 우리가 원하는 “교육, 시험, 채용의 공정성”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공정한 절차를 정립하고, 그 이후에도 꾸준한 점검을 통해 보다 체계적으로 절차를 보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예를 들어, 채용 절차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만들면 그 결과도, 이후의 삶도, 보다 공평해질까? 내가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 내가 흘린 땀의 가치를 보장받는 것, 내가 일한 만큼 돌려받는 것,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은 심사 기준을 적용하는 것. 얼핏 정당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이 요구사항은 실은 우리가 느끼는 불공정이 실제로 어디에 기원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맥거핀이다.


능력주의 모델을 넘어서

모두가 공정한, 즉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따라서 내가 부당하게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는 (다시 말해, 똑같이 보상받거나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신념은 “각자도생”에 기반한 삶의 방식을 정당화한다. 절차의 공정성이 우리의 삶을 공평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착각이다. 능력주의는 언제나 계층 이동의 신화를 뒷받침하는 장치로 여겨졌기 때문에, 능력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과 절차 자체가 구조적 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은 잘 얘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른 입시 제도와 비교할 때, 수학능력시험과 같은 표준화된 절차가 개인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안겨줄 것 같지만 (실제로 어느 수준까지는 가능하지만), 사실 시험 성적과 가구 소득 사이에는 뚜렷한 상관 관계가 있다.2) 부잣집 자녀들이 수능이나 SAT에서 일관되게 더 좋은 점수를 얻는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공정성 모델은 구조적, 역사적 불평등을 무화시키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의 효과를 지워버리는 원자화 (atomization) 모델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의 댓가를 원한다”는 외침은 결국 “성공하고 싶으면 노력해라” 혹은 “네가 가난한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같은 “온전한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외면하게 만든다. 실제로 트렌스젠더의 여대 입학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 복무가 공정성에 어긋난다며 비난받았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모든 개인은 노력을 통해 “성취”해야 하며, 그 외의 경로는 부당하다. 나의 “노오력”은 내 미래를 배신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구조적 억압과 불평등을 조정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은 나의 노력을 보장할 것 같지 않으니 일단 반대한다.

일반적 기대와 달리, 능력주의 자체가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재난 상황에서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예컨대, 코로나바이러스 국면에서 학생들의 “노력”과 “학업 성취도”를 평소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렵다. 기숙사가 문을 닫아 형제 자매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온 탓에, 좁은 집에서 대여섯 명이 부대끼며 어떻게든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학생이 있다. 그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학교의 연구실도 이용할 수 없고, 노부모의 집에도 컴퓨터가 없어서, 스마트폰으로 과제를 써서 제출해야 했던 학생에게 여전히 같은 마감일을 적용해야 할까? 위기 상황에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위해 똑같은 평가 기준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의도와 무관하게 그 시스템은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불리해진다 (the system punishes the poor). 이 때 학점은 학생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 집안의 경제적 자원에 대한 보상에 가깝고, 그 격차는 위기 상황에서 더 확대될 수 있다.

굳이 재난 상황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능력주의의 구성 원리가 이미 구조적 편견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회문화권 안에서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을 수립하고 관리하는 주체는 이미 해당 사회의 주류일 가능성이 높고, 소수자와 타자의 입장에 관해서는 무지하거나 둔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적 성취는 흔히 가장 객관적인 능력주의적 보상의 표본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이미 충분히 논의된 바 있다. 평가를 위한 기준을 수립할 때 이미 보이지 않는 편견이 개입될 수 있고, 능력주의가 작동하고 정당화되는 과정 역시 구조와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정의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능력주의 모델이 더욱 약화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를 계기로 가속화될 움직임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든, 디지털 경제라고 부르든, 혹은 포스트휴먼 (post-human) 시대라고 부르든, 미래의 일과 보상 시스템을 떠올려보면 그 방향은 엇비슷하다. 앞으로 사라질 직업으로 마트 계산원이나 운전 기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사라질 직업이 그저 단순노동직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신종 바이러스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통제가 어려워지면서, 자본의 논리 앞에 인간은 생물학적 위험(biohazard)으로 인식된다. 즉 인간은 바이러스와 오염 물질을 퍼뜨리고 불확실성을 증대시킨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AI와 로봇을 도입하고 있으며, 자동화와 가상 업무(virtual work)를 중심으로 사업 모델을 재편하고 있다. 대체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대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획득한 기술이나 자격증이 불과 몇 년 뒤에 쓸모 없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AI를 상대로 1승을 거둘 수 있는 “인간 바둑 기사”가 더 이상 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그림1]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이 지속되면서 배달 로봇을 활용하는 업체가 증가하고 있다.
(로이터통신/David Estrada)

한 개인을 노력, 능력, 혹은 생산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는 사회는 이미 도래했고, 우리는 공정성과 능력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포스트휴먼 사회에서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는 구조적이고 체계화된 차별, 억압, 불평등을 인지하고 정의(justice)의 다른 원칙들을 적극적으로 채택해야 한다. 사실 공정(equity)은 정의를 구성하는 여러 원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취약 계층(precariat)3)부터 순차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경험하게 될 사회에서는 평등(equality)과 필요(need)의 원리를 보다 전폭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바이러스 확산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사람들은 공정보다는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기를 원한다. 예컨대 긴급재난지원금을 하위 70%에게만 지급한다고 했을 때, 70%라는 임의적인 기준에 대해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했던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동시에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역시 필요의 원리를 이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술인,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그리고 실직자들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재난으로 인해 입은 타격은 질적으로 다르다. 즉 이들의 필요를 고려해서 추가적인 지원 정책을 펴는 것이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받아들여진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평등과 필요의 가치가 갖는 함의는 보다 분명해진다. 더 많은 이들이 잉여 계층 (unnecessariat)에 포섭되면서,4) 즉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계층으로 간주되면서, “줄 세우기”에 근거한 보상 체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보장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단순 노동은 사라지고, 중간 관리자는 줄어들며, 전문직의 양극화는 심화될텐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정”은 기본적으로 비교의 원칙(혹은 비례의 원칙이라고도 불린다)에 근거하고 있다. “나의 노력 수준”과 “남의 노력 수준”을 비교해서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에서 수립되는 정의의 관념을 비교적 정의(comparative justice)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비교 불가능한 정의(noncomparative justice)의 영역5)이 있다는 점 또한 상기해야만 한다. (이 개념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는 여기서 모두 다룰 수 없지만, 최근 이 오래된 개념이 다시 부상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동시에 개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비교에 근거하지 않은 정의의 모델이 필수적이다. 굳이 다른 사람의 노력과 성과에 비추어보지 않아도, 내 노력에 비례한 보상 수준을 계산해보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인간적, 사회적 조건이 있다. 디지털 경제는 그 토대를 분열시킬 수 있고, 따라서 관습적인 능력주의 모델과는 다른, 다시 말해 공정 뿐만 아니라 평등과 필요의 원리를 포괄하는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정의로운” 정책은 수많은 다른 원리들을 포함할 수 있지만 공정, 평등, 필요의 원리를 조건과 상황에 맞게 적절히 배합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기본 소득이나 전국민 고용보험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특히 기본 소득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최저 임금 또는 최저 생활비 산정에 대한 문제를 넘어, 미래 사회의 인간의 노동(지적/육체적 노동 모두를 포괄한다), 삶의 질과 행복,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의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매월 수십 만원을 지급하면서 섣불리 이를 “기본 소득”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앞으로 가져올 효과에 대해 점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논의를 시작으로, “정의로운” 그리고 “인간적인” 사회란 과연 어떤 사회를 뜻하는지, 어떤 정책적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자리가 늘어났으면 한다.


<참고문헌>
1) “’교육·채용 등 불공정’ 청년의 목소리 들어 정책으로 실현한다.” 국민권익위원회 보도자료. 2020년 3월 26일. http://www.acrc.go.kr/acrc/file/file.do?command=downFile&encodedKey=NDA5NDlfMQ==

2) “소득 높은 가정이 낮은 가정보다 수능성적 43점 높아.” 중앙일보. 2016년 1월 24일. https://news.joins.com/article/19466652

3) 이 개념에 대한 입문서로 다음 책을 참조할 수 있다. Standing, G. (2011). The p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 Bloomsbury Academic.

4) 이에 대한 간략한 논의로 다음 책을 참조할 수 있다. Greenfield, A. (2017). Radical technologies: The design of everyday life. Verso.

5) 이 개념에 대한 소개로 다음 글을 참조할 수 있다. Bies, R. (2015). Interactional justice: Looking backward, looking forward. In R. Cropanzano, & M. Ambrose (Eds.), The Oxford handbook of justice in the workplace (pp. 89-108)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