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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과 정치: 무엇이 잘못되었나?

현안과정책 308호

글/김윤태 (고려대학교 사회학 교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수상식 즈음에 한 미국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기생충>은 한국에서 사회 혁명을 일으키는 작품이라고 봐도 될까요?”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다.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 혁명이라는 것은 무언가 부서트릴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혁명을 통해 부서트려야 할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기생충>은 그런 복잡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은 불평등이라는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국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 등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대로 불평등이 사회적 결속과 삶의 질을 낮출 뿐 아니라 개인의 자존감과 역량을 약화하는 것은 분명하다. 봉준호 감독은 극심한 빈부 격차가 만든 비극을 탁월한 영화 문법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박 사장과 기택 가족 사이의 삶이 그토록 다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질문은 (봉준호 감독이 한때 사회학 전공 학생이었지만) 감독이 아니라 학자가 답해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명하지 않다. 모두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나도 2017년 <불평등이 문제다>를 출간하여 백가쟁명에 뛰어들었지만). 하지만 우리는 누구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는 있다.


왜 불평등이 커지는가?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교수가 세상을 놀라게 했던 <21세기 자본>을 읽었든 읽지 않았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난 30년간 불평등이 1929년 대공황 수준으로 급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한다. 그러나 불평등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구조적 관점은 지구화와 기술의 진보와 같은 구조적 변화가 불평등을 증가시켰다고 본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을 탈산업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본다.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류 맥아피 MIT 교수는 <제2의 기계시대>에서 디지털 기술은 성장의 엔진이면서 격차의 엔진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상위 10%가 총소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은 디지털 경제 전환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이다. 이런 기술 결정론은 기업의 투자 결정, 고용 전략, 노사관계의 역학을 무시한다. 기술이 결정적 요인이라면 산업구조, 고용구조, 교육제도가 비슷한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의 불평등 수준이 다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기술이 불평등을 키우는 악마 루시퍼는 아니다(사실 루시퍼는 원래 천사였다).


둘째, 정치·경제적 관점은 정부, 기업, 노동조합의 역학관계와 제도적 특성에 주목한다. 물론 구조적 차원과 정치·경제적 차원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서로 영향을 준다. 한국의 재벌 대기업은 지구화되는 경제에서 제조업 공장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급속하게 공장 자동화를 추진했다. 세계 최고 속도의 자동화로 인해 숙련 노동자의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동시에 기업의 노동 유연화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했다. 그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고 노조 조직률도 단체교섭 역량도 미약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비정규직의 비율은 10% 수준이었는데, 최근에는 30%를 넘었다. 영세자영업, 특수고용을 포함한 비정형 노동자의 비율은 50%에 달해 세계 최상위권이다. 노동 유연화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든 것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라는‘보이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도 정부의 조세와 사회정책이 불평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21세기 경제규칙 쓰기>에서 평등을 진작시키는 중점 과제는 재분배, 즉 누진세 강화와 복지지출 확대라고 강조한다. 미국과 스웨덴을 비교하면 시장소득보다 가처분소득의 격차가 크다. 스웨덴의 무상 보육과 교육, 국가보건서비스, 연금, 관대한 실업급여, 훌륭한 직업훈련 제도를 통한 보편적 복지제도가 불평등을 감소시켰다. 반면에 2019년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지출의 비율은 11% 수준으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한국의 낮은 조세 부담률(20%)도 재분배 구조를 악화시키고 불평등 수준을 높였다. 높은 조세부담율이 경제에 부담을 준다는 보수적 경제학자들의 우려와 달리 스웨덴과 북유럽 국가들은 재정도 건전하고, 국제 경쟁력도 높으며, 고등교육과 첨단기술 연구개발 등 미래에 대한 투자도 선두권이다.

그러면 왜 한국의 사회지출 수준과 조세 부담률이 낮은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복지국가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다수제 민주주의와 소선거구제, 재벌 대기업 중심 산업구조,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주요 원인으로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선거제도, 재벌의 지배구조 개혁, 산별 노조의 강화가 중요한 과제이다. 실제로 비례대표제를 통한 합의민주주의, 노사 협력을 강조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산업별 단체협약이 발전한 국가에서 빈곤과 불평등의 수준이 낮다. 특히 선거제 개혁이 중요하다. 피터 홀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와 데이비드 사스키스 런던정경대 정치학 교수가 영미권의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승자 독식 정치가 등장하고, 서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에서 타협과 공존의 정치가 발전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소선거제 중심의 지역주의 정치구조가 재생산되면서 지역 개발만 부각되고 조세와 복지 공약은 무시되었다.


정치의 역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정치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정당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집권당이 정부 정책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진보정당이 집권해도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미국의 민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이 집권해도 그다지 불평등이 줄어들지 않았다. 2019년 프랑스에서 출간한 토마 피케티 교수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이 문제에 주목했다.


피케티 교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과 북미의 유권자 지형과 투표 성향을 분석했다. 1960년대까지는 유럽과 미국에서 계급투표가 이루어졌다. 저학력 저소득층은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만, 고학력 고소득층은 보수정당을 지지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고학력층의 진보정당 지지도가 늘어났다. 변호사 출신인 클린턴, 블레어, 슈뢰더가 집권했던 2000년대 이후에는 확고한 현상이 되었다. 진보정당은 저학력 빈곤층이 아니라 고학력 고소득층의 정당이 되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먼저 고학력 인구가 증가하고 다양해졌다. 대학 졸업자가 급증하면서 광범한 사무관리직이 등장했고, 변호사, 경영자, 엔지니어 등 상층 전문직도 늘어났다. 둘째, 저학력 제조업 노동자계급이 대거 사라졌다. 기업의 해외 이전과 자동화로 인해 제조업이 붕괴하면서 숙련 노동자가 줄어드는 대신 식당 직원, 택배 배달원, 운전사, 청소부 등 다양한 서비스 노동자가 급증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떨어지고 정당에 미치는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다.


진보정당의 기반이 무너지자 정치적 생존을 위해 새로운 지지층을 찾았는데, 그들이 바로 진보적 중산층과 전문직이었다. 그들은 대개 고학력 화이트칼라와 변호사, 전문경영인, 기술 개발자 등이었고, 동성애, 낙태, 채식주의 등 문화적 가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 후 진보정당은 임금 인상, 재분배 등 경제 이슈보다 정체성, 세계화, 다문화주의 등 문화적 이슈를 강조했다. 진보정당에 68혁명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들어왔지만, 이들은 더 이상 경제적 불평등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적 노동자계급은 문화적 진보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대다수 노동자는 동성애와 낙태에도 반대했고 세계화와 국제 이민도 좋아하지 않았다. 미국 역사학자 토마스 프랭크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서 설득력 있게 분석했듯이 노동자들은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는 공화당에 표를 던졌다. 새로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빈곤층은 정치적으로 지지할 정당이 없어졌다. 하층민들이 정치 과정에서 배제되면서 불평등 문제는 정치적 의제에서 사라졌다. 결국 클린턴과 오바마는 말로는 노동자와 약자를 말하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부자와 전문직의 손을 들어 주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민주당의 행태에 대해서는 래리 바텔스 벤더빌트대 정치학 교수의 <불평등 민주주의>를 읽어보시라.


이렇게 진보정당의 배신이 계속되는 동안 극우 포퓰리즘 정치 세력이 전통적 노동자와 빈곤층을 깊숙하게 파고 들어갔다. 극우 정치는 세계화와 이민을 반대하고 모든 엘리트 기득권 집단을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월스트리트에서 수십억의 강연료를 받은 힐러리 클린턴을 비판하고, 은행에 세금을 올리겠다고 약속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 모았다. 트럼프는 1930년대 독일의 히틀러와 비슷하게 외국인 혐오와 이민 반대를 내세우며 최하층에 있는 노동자계급까지 파고들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도 극우 정당은 이민과 난민 유입을 반대하고 보호주의를 내세우며 선거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다.


피케티 교수는 진보정당이 ‘브라만 좌파’라 불리는 고학력 엘리트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강남 좌파’와 유사한 개념이다. 반면에 우파 정당은 전통적으로 ‘상인 우파’라 불리는 비즈니스 엘리트를 대변했다. 결국 정치는 모두 엘리트의 지배를 받고, 노동자와 대다수 사람은 정치에서 배제된다. 이로 인해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균열보다 정치에 참여하는 계층과 거부하는 계층의 균열이 더 커졌다.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말하며, 거의 절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서 미국의 트럼프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프랑스 국민전선의 급속한 부상이 이루어졌다.


프랭크 교수는 2016년 트럼프 당선 직전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민주당이 1930년대 루스벨트 행정부 이후 핵심 가치인 평등주의를 스스로 포기하고, 선거 때마다 “공화당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국 유권자를 깃발 아래로 결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정당”이라고 비판했다. 이 책은 미국 민주당뿐 아니라 오늘날 진보정당이 핵심 가치를 버리고 지지층을 배신하는 현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클린턴과 오바마가 집권하는 동안 투자와 고용 확대라는 명분 아래 기업과 부자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립과 자활을 가치를 강조하면서 복지급여를 삭감했다. 대신 누구나 (하버드와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자신들처럼 좋은 교육을 받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만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의 선거 공학이 작동한다. 프랭크는 이렇게 적었다.


“워싱턴에 입성한 민주당원들은 인구 통계학적인 변화 덕분에 앞으로도 계속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믿고 있다. 2008년부터 언론은 민주당에 승리를 안겨 준 거침없이 늘어나고 있는 민주당 옹호 집단을 묘사하면서 ‘우세의 고착화’라는 문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 소수자, 중상위 계층 백인 전문직 종사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프랭크,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22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젊은 층과 유색 인종이 증가로 민주당의 장기 집권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은 트럼프의 돌풍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화씨 11/9>에서 보여주었듯이 많은 노동자와 흑인들은 오바마의 배신에 분노하고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트럼프는 평생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던 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까지 끌어 모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프랭크 교수는 저학력 육체노동자들이 왜 민주당에 등을 돌렸는지, 클린턴과 오바마에게 배신당했다고 분개하는지, 민주당 스스로 돌아보라고 일갈한다.


한국 민주당의 과제

1998년부터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민주당은 호남 정당이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고 스스로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빈곤과 불평등이 증가했다는 사실은 뼈아픈 결과이다. 두 대통령이 복지국가를 탄생시켰지만, 공기업 민영화, 노동 유연화, 부자의 소득세와 법인세 인하, 민간의료보험 활성화가 미친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 말했지만, 사실 시장에는 대기업, 중소기업, 노동자, 소비자들이 존재하고, 그 정점에는 재벌이 있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재벌과 부유층의 연봉과 재산은 급증하고 서민의 지갑은 더욱 얇아졌다. 그 후 진보정당은 사분오열되고 이명박, 박근혜의 보수정당이 집권하면서 빈곤과 불평등이 심각해졌다.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소득과 재산 집중, 하늘로 치솟는 사교육비, 부동산 가격, 가계부채 증가에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2016년 촛불 시민혁명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등장했지만, 개혁의 성과가 미진하다는 지적이 많다. 1700만명의 시민이 모인 대규모 시위는 단지 국정농단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세습, 정경유착에 대한 거대한 저항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재벌, 노동, 복지, 교육 등 진보적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보다 재벌에게 고용과 투자를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당은 빠르게 고학력 고소득층의 정당으로 변화하면서 과거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공약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았다. 2004년 삼성경제연구소와 함께 시장경제를 연구한다고 말했던 열린우리당의 기억처럼 재벌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만 걱정하는 듯하다. 세금 인상은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선거공학에 빠진 듯하다. 심지어 2020년 총선에 민주당 원내대표는 서울 강남 유세장에서 종부세 인하를 외쳤다. 민주당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는 주장을 잊은 것이다.


왜 민주당은 검찰 개혁처럼 재벌 개혁에 나서지 않는 것일까? 왜 조국 서울대 교수를 ‘수호’하듯이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사회적 약자를 돕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불평등을 줄이는 임무에는 관심이 없는 것인가? 물론 민주당에는 진보적 정치인들이 있고, 그들은 보수정당에 비해 서민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그들은 재벌 개혁, 누진세 인상, 복지 확대, 교육 개혁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대다수 학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듯이 북유럽 국가들이 높은 조세와 복지 예산에도 불구하고, 공교육과 직업훈련 등 사회투자에 성공하고, 근로 동기, 삶의 질, 행복감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지에 대해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후 비정규직 증가를 막지 못하고 복지 예산을 충분히 확대하지 못해 가장 아팠다고 말했지만, 아직도 민주당은 이 과제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래의 노무현 대통령의 육성은 지금도 큰 울림을 가진다.


“내가 잘못했던 거는 오히려 예산 딱 가져오면 색연필 들고 ‘사회정책 지출 끌어올려’ 하고 위로 쫙 그어버리고.... 무슨 소리야 이거,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 내년까지 40%, 내후년까지 50% 올려.’ 쫙 그어 버려야 되는데, 앉아서‘이거 몇 % 올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 그래 무식하게 해야 했었는데 바보같이 해서….”


불평등의 미래

<기생충>이 2020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직후 축하연에서 이미경 씨제이그룹 부회장은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생충을 처음 봤을 때 저소득층이 고소득층에 기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로 봤을 땐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이 서로에게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서로에게 기생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면서 선을 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기생충>의 감독은 서민의 삶을 다룬 <천변풍경>의 작가 박태원의 외손자이고, 투자자는 이병철 삼성그룹의 손녀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미경 부회장의 바람과 달리 현실에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모두 보여주지 못한 빈곤층의 잔혹한 현실을 재벌의 시각으로만 바라본다면 <기생충>의 교훈을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기생충>의 성공 덕분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극적인 선거 결과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부패 정치인과 카카오뱅크와 미래에셋 사장을 공천한 민주당에 기대할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선거 공약에서 구체적 플랜이 보이지 않고 (인기 없는 공공와이파이 공약은 취소했지만) 4대 벤처 강국과 공허한 경제 민주화 공약에 실망한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주당의 정치 전략이다. 올해 마이너스 성장률이 예상되는 가운데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일자리, 기후변화 등 커다란 난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민주당이 어떤 국정 과제를 주도할 것이냐에 따라 불평등의 수준이 달라지고, 경제의 역동성과 사람들의 삶도 변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불평등 해소를 최고의 국정 목표로 삼고 있는데, 반대도 많고 속 시원히 금방금방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매우 애가 탄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불평등을 중요한 사회문제로 생각한다면 노동자와 빈곤층의 이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작년처럼 최저임금제 동결과 주52시간제 후퇴로는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 과거처럼 재벌의 세금을 줄여주고, 공공서비스를 기업에 넘기고, 교육과 복지에 쓸 돈이 없다고 말하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 재벌, 노동, 복지, 교육 개혁에 앞장서고, 적극적 산업정책으로 혁신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주도하고,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그린 뉴딜에 추진한다면 보통사람의 삶의 질은 점차 개선될 것이다. 지금 국민이 민주당을 바라보는 눈길이 날카롭다. 우리는 낙관과 비관의 기로에 서 있다. 진보주의자라면 지난 3년처럼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말 대신 행동을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