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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정치경제

현안과정책 303호

글/김창엽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 (사) 시민건강연구소 소장)


코로나19를 비롯한 감염병은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인 사건인 동시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현상이다. 마스크의 과학은 마스크라는 자원을 배분할 때의 우선순위 문제와 만나고, 중국 경유자의 입국 금지는 방역의 실효성과 함께 국제 정치경제를 고려해야 한다. 불안과 공포라는 개인 반응조차 인종주의, 식민주의, 신자유주의 등 사회경제 체제 또는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감염병의 정치경제란 단지 감염병에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 요인이라는 의미를 넘는다. 발생부터 유행과 확산, 대응, 결과와 영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나는 감염병을 둘러싼 현상과 사건은 병원체와 비인간(non-human), 사람, 사회의 심층 구조로부터 ‘발현(emergence)’한 총체적 결과이다, 이런 의미의 정치경제란 결국 그 발현 과정을 종합적으로 해명하려는 존재론이자 인식론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과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치경제적 접근은 푸코적 의미에서 ‘감염병 레짐’을 비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감염병의 ‘모든 것’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자연)과학적 모델, 특히 생의학적(biomedical) 모델로부터 사회적 모델로 전환하려는 시도이다.

빈발하는 신종 감염병과 인수공통감염병

코로나19는 신종 감염병이자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여기서 신종(emerging)이란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던 병원체가 새로 감염병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새로움’보다는 ‘생성’의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는 인간에 해롭지 않았으나 새로 질병의 원인이 된 데는 어떤 변화가 있었고 새로운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감염원인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인간의 감수성, 또는 감염원과 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조건이 달라진 결과 새로운 감염병이 나타난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인수공통감염병(人獸共通感染病)이라는 말도 익숙해졌다. 이는 동물이 자연 숙주인 감염병으로 인간에게 전파되어 감염을 일으킬 때 그 감염병을 일컫는 말이다. 인수공통감염병이 곧 신종은 아니라는 점도 덧붙인다. 과거부터 인간 감염병 상당수가 이런 범주에 속했고, 우리가 잘 아는 천연두나 결핵도 본래 인수공통감염병이었다. 최근 사스, 에볼라, 조류 독감 때문에 새로 주목을 받고 있으나, 인간 감염의 60%를 넘을 정도로 흔하고 비중이 크다. 

오래전부터 인류와 공존해온 인수공통감염병이 그것도 신종의 형태로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두 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나, 가장 유력한 이유는 인간과 동물의 접촉이 빠른 속도로 증가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무분별한 산림 파괴와 경지개발 등이 과거에 없던 사람과 동물의 밀접 접촉을 부추기고 그 결과 동물에 있던 병원체가 새로운 위험을 안고 인간으로 전파된다. 주로 밀림의 야생동물에 존재하던 에볼라 바이러스는 숲이 없어지면서 인간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바이러스는 새로운 환경에서 스스로 변화하며 인간과 만난다. 

실증적 연구가 이런 설명을 뒷받침한다. 2017년 출판된 올리베로(Olivero) 등의 연구를 보면, 에볼라가 발생한 서부 아프리카 27개 지역을 조사한 결과 최근 산림을 없앤 지역에서 유행의 확률이 더 높았다. 1998~9년 말레이시아에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니파바이러스 유행은 숲을 파괴하여 양돈 농장을 확대한 직접적 결과였다. 

산림을 없애고 경지를 확대하며 숲속에 축산 공장을 짓는 일은 개별 경제 주체의 시장 행동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이런 현실 변화의 심층에는 지구적 규모의 정치경제 구조가 실재한다. 대상과 영역이 농업, 임업, 축산업 그 무엇이든 한마디로 말해 세계적 규모로 구축된 불평등한 국제분업체계의 직접적 결과물이다. 에볼라의 ‘체제성’을 연구한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왈라스는 이런 감염병 레짐을 가리켜 ‘신자유주의적 에볼라(neoliberal ebola)’라 부를 정도다 (책 소개는 http://bit.ly/2U4RIsR).

ⓒ프레시안

감염병 유행과 확산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는 작은 유행병(endemic)이 지구적 범유행 (팬데믹, pandemic)으로 퍼지는 가장 좋은 조건이다.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뛰어난 이동성과 연결성이 특히 그러하다. 2009년 유행한 인플루엔자A(H1N1)는 태평양을 건너 전파되는데 단지 9일이 걸렸는데, 당시 어떤 방식으로 계산하든 예상보다 몇 달 이상 빠른 속도였다. 100년 전 유행한 스페인 독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국내 이동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유행이 처음 발생하던 당시 중국 내 항공 이동은 사스 발생 시 대비 열 배 이상 늘어난 상태였다. 

세계화된 경제체제에 편입된 이상 어느 국가도 이런 조건을 뛰어넘을 수 없으므로 입국 금지나 봉쇄와 같은 방역 기술은 불가능하고 무용하다. 한국에서 논란을 빚었던 중국 경유자 입국 금지 문제만 해도 그렇다. 내국인 입국자만 해도 유행 전에는 하루 1만 3천 명, 유행 후인 2월 초에도 약 3천 명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들은 대부분 두 나라 사이를 오가야 하는 경제 주체들일 터다. 국가 간 이동을 금지하거나, 혹은 이동은 허용하면서 강제로 또는 자발적으로 격리하는 것이 가능할까? 감염병 확산을 막을 목적으로 국가 간 이동을 금지하는 것은 방역의 과학이 아니라 정치, 그것도 주로 국내 정치다. 

도시화 또한 감염병 확산과 유행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에 들어간다.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하고 전파된 중국 우한이 대표적인데, 이는 단지 많은 인구가 밀집한다는 도시의 평면적 특성만 의미하지 않는다. 우한은 산업 생산 기지이자 교통과 교육 중심지로, 세계화된 도시의 특성을 고루 갖춘 곳이다. 춘절 기간 고향을 찾아 이 지역에 머물렀던 5백만 명 이상이 우한 봉쇄 전에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 전파와 유행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많은 이주 노동자 또한 다른 지역과 나라로 흩어져 곳곳에 감염원이 되었다. 이 거대 도시는 중국 사회경제체제,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완전히 통합된 공간으로, 감염이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유행과 확산의 정치경제는 방역 수단과 기술에 통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 유행을 억제하는 유력한 수단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사회적 (혹은 물리적) 거리 두기’는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적용 가능성과 범위가 달라진다. 보통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학교, 종교단체, 여가 활동 등은 비교적 쉽게 이 방법을 적용할 수 있으나, 생산 활동과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개인 수준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기 어렵다. 경제 활동의 지속성 문제와 함께 노동을 중단하는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 하는 ‘권력’ 문제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많은 노동자는 시간제 임금을 받거나 유급휴가가 없어 일을 쉴 수 없고, 따라서 이들에게 일터에 나가지 않는 사회적 거리 두기는 실천할 수 없는 방역 기술이다.


감염병에 대응하는 불안한 주체

지식과 기술로 한정해도 이를 적용하는 환경과 조건은 사회적이며, 따라서 모든 감염병 대응은 경제적 정치와 정치적 경제를 피할 수 없다. 특히, 겉으로 개인적 반응이나 대응처럼 보일 때도 그 뿌리는 흔히 사회경제 구조에 닿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번 사태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 일반 시민의 불안과 공포는 심리를 넘어 정치경제적 현상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코로나19는 유행 초기부터 치명률이 매우 낮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막지 못했다. 흔히 이런 불안과 공포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이 불확실성이 과거보다 더 큰 것도 아닌데 왜 불안과 공포라는 사회적 반응은 점점 더 강화되는가? 정확한 지식이 공포를 줄인다고 하지만 이 또한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불안과 공포는 바이러스, 질병, 건강 또는 지식 그 어느 것에 대한 것도 아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체화된 경험과 기억, 더 구체적으로는 삶의 파탄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만약 감염자가 되고 병에 걸리면 나는, 내 가족은, 그리고 직장과 내 장래는 어떻게 될까? 나와 내 가족의 미래가 불확실한 것이 핵심이다. 병에 걸리더라도 (치명률이 낮으므로) 큰 부담 없이 좋은 치료를 받고, 경제적 타격도 별로 없으며, 사회적 차별이나 오명이 붙지 않고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으면? 불확실성은 크게 줄어들고 나는 내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는다. 

따라서 불안과 공포는 개인 속성이라기보다 구조적이면서 역사적이다. 감염병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서의 현존 사회경제 구조,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다. 감염병 유행으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경험과 학습을 통해 불확실성에 적응한 ‘불안 체제’가 점점 더 공고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데이비스(William Davis)는 <신자유주의의 한계 (The Limits of Neoliberalism)>이라는 책에서 “[이 체제에서] 각 개인은 어떤 종류의 경제적 불확실에 훈련되고 조정되는데(’넛지‘), 그 전제는 경력, 연금, 가정생활에 예상하지 못한 타격을 받을 때 각자 알아서 더 잘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불안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제이며 각 개인은 ‘불안 전염병(anxiety epidemic)’을 피할 수 없다 (http://bit.ly/2IOp8qw). 

우리 사회의 ‘불안 체제’는 감염병 유행 과정에서 (흔히 ‘각자도생’이라 부르는) ‘개인화’ 현상을 심화한다. 다음은 비교적 유행 초기에 나타난 한 가지 현상에 대한 언론 보도로,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다른 곳과 영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것이었다.

보육시설 휴업도 제각각이다. 22번째 확진자가 나온 OO OO시는 지난 7일부터 관내 어린이집 90곳과 지역아동센터 23곳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30곳의 공·사립 유치원은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한다.전면 중단된 OO도의 노인 일자리사업도 논란거리다. OO도는 노인 등 취약계층으로 신종 코로나가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인 일자리사업 등을 일시 중단하면서, 집에서 맞벌이 자녀의 ‘손자’들을 돌보는 ‘손자녀 돌보미사업’까지 일괄 중단했다. 보육시설이 문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집에서 맞벌이하는 부모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왔던 노인들의 활동을 막은 셈이다

개학을 연기하고 공공기관을 닫는 것도 비슷하다. 지금은 사회적 거리 두기의 한 방법이라고 하지만, 그 전부터 건강과 질병은 개인사였고 더구나 감염병에서는 각자 지역사회와 가정으로 흩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개인화 경향의 심화는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체제에서 연유한 ‘불안 체제’에서 개인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각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라기보다 공동체를 믿기 어려울 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긴급 조치 이전의 미국처럼 코로나 확진 검사에 백만 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코로나가 마무리되는 대로 맞춤형 민간보험이 쏟아지고 많은 사람이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불안을 이기려 할 것이다. 

불안 체제는 심리일 뿐 아니라 물질적(materialistic) 토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감염병에 대응하는 사회적, 집단적 능력은 ‘공동재(common goods)’라는 것이 정설이다. 공중위생, 응급의료, 재난 대응, 건강보장 등 다른 공동재도 그렇듯, 공유하는 기반이 약하면 재난 상황에서도 책임은 개인으로 분산된다. 공동체가 같이 투자하고 유지해야 할 공동재를 상당 부분 개인별 자산으로 바꿔놓은 체제, 그것이 감염병 유행에 반응하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사회경제적 조건이다. 

사회경제 체제에 조응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은 개인화를 내면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토 요시유키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규범을 내면화해 자기 관리를 하는 규율적 주체는 오히려 자기를 투자의 대상으로서 철저하게 경영(management)하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즉 시장 원리를 내면화하고 그것에 기초해 자기를 경영하는 경제적 주체로 치환"된다(<신자유주의와 권력>). 우리는 진작 ’자기 자신의 기업가‘라는 원리에 동의했고 이젠 그 원리를 내면화한 새로운 주체다. 철저한 동선 추적과 발본색원의 전수조사라는 강박 또한 개인화한 감염병 관리체계를 바람직한 가치로 받아들인 결과다. 모조리 금지, 봉쇄, 휴업, 폐쇄, 휴교하는 것이 유일한 안전이라는 믿음도 같은 원리다.


신자유주의적 국가 통치와 감염병 관리의 모순 

서구에서는 감염병 유행을 막는 데 검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17~8세기 무렵 훈육(discipline)과 지식을 기반으로 확립된 통치 메커니즘을 대표한다. 그리고 1832년 콜레라 확산 방지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생명권력(biopower)이라는 새로운 통치 메커니즘이 등장했다. 공중보건은 훈육과 더불어 ‘계도’(푸코는 이를 사목 권력이라 부른다) 기능을 하게 되고, 이제 공중보건은 경험적 데이터에 기초하여 인구를 관리하는 핵심 통치기술이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 책임과 책무성을 지속해서 분산하고 '미시화'하려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국가 통치의 특징이다.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에서 이는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까지 ‘민영화’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국가권력이 책임을 피하려고 보건의료의 '통치를 민영화'하고, 직접 개입해야 하는 영역도 ‘준 민영화’를 추진했다. 다른 말로는 ‘큰 공공성’을 회피하면서 ‘작은 공공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활용했고, 이는 책임 주체를 전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폐원한 진주의료원을 예로 들면, 공공성이나 공공보건의료 문제는 중앙정부로부터 광역 정부(도)로 이전되고, 이는 다시 개별 기관(진주의료원)으로 넘어갔으며, 한 가지 방법으로 의료급여 환자를 문제 삼는 순간 책임은 개인까지 이르렀다. 문제의 원인이든 해결의 주체든 국가권력은 보이지 않고, 공공성과 공공보건의료는 최종적으로 진주의료원이 운영을 어떻게 했느니 의료급여 환자의 의료이용이 과잉이니 하는 미시적 문제로 전환했다.

이번 유행에 대응하는 국가 통치의 원리는 제도화한 의료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특별한 사안과 프로그램의 특성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적 통치 구조가 현상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코로나19 환자 치료를 상당 부분 민간 병원(국립대학병원도 민간병원과 근본적 차이가 없다)과 자원 봉사자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 의무의 ‘외주화’라 할 수 있다. 예방 분야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지역별 방역은 (국가가 아닌)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시도 감염병관리지원단”이라는 ‘지원기구’가 사실상 중심 역할을 했고, 이는 국가가 “지역별 특성에 맞는 감염병관리 및 신속한 초동대응”을 민영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의 소개. http://bit.ly/2ILniX5).

신자유주의적 건강체제의 중요한 특성 한 가지는 반드시 개인화 경향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여기에 맞는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프레이저(Nancy Fraser)의 말을 빌리면, 신자유주의 통치성이란 이런 것이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 중). 

개인주의적으로 표준화된 빅토리아 시대의 주체도 아니고 집단적 복지와 관련된 포드주의적 주체도 아닌 새로운 통치성의 주체는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행위자다. (시장에서) 선택하는 주체이고 서비스의 소비자인 이러한 개인은 그 자신의 결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질을 고양시켜야만 한다. 

국가권력은 개인(개별 주체)이 의료와 돌봄, 여기서는 감염병 예방과 치료를 집단적 복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책임지며 자신의 결정을 통해서 삶의 질을 고양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지역사회나 공동체, 나아가 지방자치단체는 좀 더 큰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을 관리하고 바람직한 결과를 산출하는 대응의 기술이나 원리와 흔히 상충한다는 점이다. 검역,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 예방접종 등이 모두 마찬가지로, 이들은 각자도생하는 개인이 아니라 협력하고 연대하는 공적 주체성을 통해 비로소 작동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효율적으로 작동할수록 방역과 감염병 관리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과잉 정치화, 과소 정치화, 그리고 ‘잘못된 정치화(mis-politicization)’

코로나19의 정치경제에 관해서는 국제정치와 국제기구(예: 세계보건기구에 대한 논란), 근대성(과학적 지식과 적용), 지식 권력과 전문직(방역에서 의사와 임상 의사의 권력), 과학기술(백신과 치료제로 다음을 대비하자는 주장), 미디어와 뉴미디어(시장 경쟁과 미디어 행태), 포스트 식민주의 문제 등도 같이 생각해야 하나, 지면 사정상 다른 기회로 미룬다. 

신자유주의적 ‘감염병 레짐’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코로나19의 정치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이 구조의 현상이자 결과물이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 권력을 축적하고 기존 권력에 대항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질병, 특히 감염병의 발생과 유행은 정치화를 피할 수 없으며, 코로나19 유행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잉 정치화와 과소 정치화도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현실 정치에서 감염병이 과잉 정치화했으나,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라는 과제는 과소 정치화를 면치 못했다.

감염병의 ‘잘못된 정치화’는 과잉 정치화와 비교하면 관심이 덜하다. 여기서 잘못된 정치화란 정치화가 개인화를 내면화한 시민에게 피해와 불이익을 끼치는 경우, 그리고 그러한 방향의 내면화를 강화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감염병의 유행을 막는 데는 공동재의 축적이 중요한데, 방역과 그 체계를 완전히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철저하게 개인화하면 어떻게 될까? 경제적 합리성과 경쟁 시장을 전제로 한 방역의 정치화는 기존 체계를 공고하게 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이에 토대를 둔 기술은 무용하게 한다. 

과학과 지식이 더 발전해도 감염병의 정치는 그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정치화를 피할 수 없으면 우리의 관심사는 ‘더 나은 정치화’가 되어야 할 것이며, 좋고 나쁨을 나누는 데는 ‘사람의 관점(people’s perspective)’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준을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이때 ‘대항하는’ 정치화의 실천 주체는 당연히 ‘사회권력’이다(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 

지역사회 감염이 한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확산 여부를 걱정하는 때에 ‘시민참여형’ 또는 ‘민주적’ 방역체계(감염병 레짐이라 불러도 좋다)를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 체계가 국가권력-경제권력-사회권력의 ‘앙상블’이라면, 새로운 실천 원리는 ‘민주적 공공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반드시 대안이자 대항적 체제로, 개인의 지식, 자발적 실천, 포용적 지역사회(학교와 직장 포함), 숙의(deliberation)에 기초한 의사결정 등이 요체다. 지금까지 축적된 역량에 좌우될 수밖에 없지만, 현재는 또한 새로운 경험과 축적의 계기이기도 하다.